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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제의 유익함 (전 0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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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을 어떤 철학자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군가와 교제의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교제의 유익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1. 교제는 불행을 서로 나누어 가집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역자는 이렇게 상대반의 고통을 덜어주는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기억합니다. 사실 다윗과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과의 관계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그런 것을 초월하고도 남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크나큰 힘이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든지 요나단은 다윗을 도왔고, 다윗은 이 도움으로 낙망치 아니하고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삼상 18:1에는 요나단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이러한 마음을 가진 친구를 소유한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교제의 힘이 불행을 이기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 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헤롯의 손에 붙잡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와 같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순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5절). 평소에 그와 함께하던 교우들이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마침내 이 기도는 베드로를 살렸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옥문을 열고 베드로를 구한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왜 자기가 이런 도움을 받는지 몰랐습니다. 아니다, 기도한 교우들 자신들도 베드로가 살아나올지 몰랐습니다. 13절에서 16절 사이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살아 돌아온 것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교제의 능력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제란 그 불행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2. 교제는 영적인 능력을 촉진시켜 줍니다. 교회의 어원을 살펴보면 “에클레시아”, 곧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교회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모여 교제하는 곳이란 뜻입니다. 교회를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할 때 교제는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이고, 이 교제 속에는 예배, 봉사, 교육 등의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이 교제의 요소가 매우 강했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여 떡을 뗐다는 사실은 교제가 초대교회에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초대교회의 교제가 오늘 날처럼 세속적인 사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영적인 교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형제로 그리스도와 결합되려고 날마다 모여 교제한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행 2:46-47) 지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를 통해 교인들은 자신의 영적은 힘을 키워갔던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이러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세속적인 타락된 교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도의 교제는 영적인 분위기가 성숙된 곳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곳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타락된 교제는 악을 행하는데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영적교제가 영적인 능력을 증진 시키듯 타락된 교제는 악의 능력을 더욱 증진시킵니다. 롬 1:32에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의 교제는 악한 일을 더욱 많이 행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타락된 교제가 교회 내에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최근 미국의 교회들이 사교장으로 전락해가는 현상은 영적교제를 위한 교회의 사명을 잊어가는 불행한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정신 차려야 합니다. 날마다 모여 교제를 하되, 그 교제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교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 교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본문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도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매우 강하고 조직적이어서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낼 때 둘씩 보내었다고 했습니다.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어”(눅10:1), 또한 사도행전에 나오는 복음전자들도 함께 다녔습니다. 이것은 긴 전도여행 동안 생길 수 있는 어려움을 서로 나누어지고 힘을 합해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머리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많은 동역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어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은,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셨습니다. 이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양한 은사로 함께 모인 교회는 마귀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효과적으로 대적할 수 있고, 또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함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가 없는 기독교인의 모임은 아무 능력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두려움과 불안에 젖어 사람들을 피해 숨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났을 때 비로써 힘을 모았고 그 힘은 이제 세계 역사를 변화시킬 만큼 강력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혼자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성도들 간의 깊은 영적교제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승리할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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