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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누이 (아 08: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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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절에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은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그가 성벽일진데 우리는 은방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데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술람미 여인의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에서부터 미숙한 신자들에 대한 관심까지 표명하고 있습니다.

1. 작은 누이에 대한 관심 본문에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함을 받은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라고 하였습니다.

(1) 이것은 유대 종교가 이방인 세계에 대하여 한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아담의 후손이기에 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유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도, 성경도, 사역자도 없으며 빨아 먹을 수 있는 위로의 유방도 그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 게는 약속의 언약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지 못한 이방인에게 교회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2) 이는 따라오는 후배 성도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급급하던 술람미가 이제는 따라오는 후배 성도들의 유방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신이 없이는 남에게 큰소리를 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미흡한 주제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자기를 먼저 돌아보고 난 후에 남의 일도 돌아보아 주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따라서 남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는 풍성한 신앙을 소유한 자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작은 누이의 유방에 대해서 관심을 두었습니다. 유방은 여성으로서 성숙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남의 아내가 되어 구실을 할 수 있는가 여부를 알아볼 수 있는 육체적 상징 부위입니다. 그런데 이 신부는 유방이 적어서 신랑 되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아직 영적으로 주님의 신부가 되기에 미숙한 누이에 대하여 이렇게 걱정을 해 주었습니다.

(3) 작은 누이의 문은 그녀의 정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조는 여인의 가장 중요한 것인데 술람미 여인의 보기에 작은 누이는 무방비 상태로 적에게 정조를 마음대로 유린당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했습니다. 그러므로 술람미는 이를 막기 위해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고 하였는데 백향목 판자란 주님의 말씀으로써 이것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키도록 하겠다는 말입니다. 철이 없어 자기 정조를 지킬 줄 모르는 후배 성도들 에게 신앙에 대한 절개를 지킬 수 있게 역시 성경은 예언적인 요소가 어디엔가 반드시 끼워 있게 마련입니다. 성경을 쓸 그 당시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님 재림의 사건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 중 다섯 미련한 처녀가 바로 술람미가 본문에서 말하는 작은 누이입니다. 유방이 없고 문이 열린 성벽 같은 대비책이 없는 개방 상태의 위험성을 지닌 여성을 어린 신앙 또는 이방인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2. 술람미의 자기 평가 10절에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1) 그러므로 나는‥‥‥ 이라고 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새삼스럽게 자기를 돌아보며 작은 누이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성숙한 여인이 된 것을 흐뭇해 하는 것입니다. 작은 누이와는 달리 불쑥 솟아나온 풍만한 유방, 성벽 문을 닫은 자기의 신앙 정조는 정말 신부로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2) 그의 보기에 성도는 그의 주님 신랑께서 보시기에 완벽한 상태의 여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심 있는 자가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성숙한 성도인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총애를 얻은 이 여인은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선하신 하나님의 의지라고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3)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정말 안심해도 되는 정도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불안과 초조의 약혼 이전의 시기는 지나고 이제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기에 충분한 시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돌아가는 차원에 이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지의 자신을 가리켜 갈 6:17에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십자가의 흔적을 지고 가노라”고 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보시기에 성도로서 인침 받아 구원의 확신 얻은 기쁨에 넘치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신랑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그의 신부로서 확신을 가져 기쁨을 누리며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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