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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중 죄악과 이중 치료 (렘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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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유대의 마지막 왕이 살던 궁전에 투옥되었던 선지자입니다. 장기간의 민족적 비극은 거의 마지막 행위의 마지막 장면에 도달 했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대의 멸망을 대담하게 예언하였으며 멸망뿐만 아니라 멸망 후에 고침과 치료를 해준다는 희망에 넘친 약속을 예언하는 확고한 미래의 비전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1. 인간의 슬픈 조건에 관한 삼중 견해

(1) 선지자가 인간의 슬픈 조건을 묘사하는데 사용한 세 가지 단어 인간의 추악한 면을 세 가지로 묘사했는데 우리의 한글개역에서 이 세 가지 단어를 죄악이라고 똑같이 번역했으나 이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고 이 세 가지 단어는 히브리어로 볼 때 동일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2) 선지자가 인간 슬픈 조건을 묘사하는데 사용한 세 가지 단어의 의미 1) 죄 많은 생활은 외곡되거나 비틀린 생활입니다. 구약 성경에 사용된 “inquity”, “한 역에서 죄악이라고 번역되었음”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똑바른 것이 아니고 굽었거나 비틀렸 거나 외곡된 것을 의미 합니다. 모든 죄는 인간이 걸어야 할 적절한 과정에서 비꼬여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똑바른 길이 있으며 거기에는 우리가 걸어야 하는 바른 길을 벗어난 길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전진하는 길 대신에 빙빙도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2) 죄 많은 생활은 과거에서 빗나간 생활입니다. 원래 “Sin”, “한역에서는 죄를 범한다고 번역함”이란 말은 단순히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을 두 가지 방법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목적을 잃어버린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며 자기 앞에 놓인 보잘 것 없는 목적을 놓쳐 버리고 죄를 범하며 사는 것과 비천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든 것은 잘못입니다. 3) 죄 많은 생활을 반성하는 생활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transgressed”, “한역에서는 죄악이라고 번역되었음”이란 문자 그대로 “반역”을 의미합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리까지 끌어 올려서 “우리가 섬길 주님이 누구이며 우리를 지배할 주님이 누구인가? 그의 끈을 끊어버리고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자”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2. 암흑속의 이중의 밝은 소망 만일 죄가 필자가 설명한 이런 모든 특성이 결합된 것이라면 죄는 분명히 오염된 것이며 본문에서는 여기에 관련된 두 가지 은혜로운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1) 용서 1) 용서의 의미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용서할 때 어떻게 용서해 줍니까? 매질을 하기도 하고 매질을 하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형벌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들이 올바른 길로 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용서 하시는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시 99:8에 “저희 행한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 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2) 용서의 필요성입니다. 여러분은 용서가 필요합니까? 죄책감은 무어라고 합니까? 양심은 무어라고 합니까? 우리는 모든 죄가 반드시 커다란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소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세상에서는 이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이것을 남겨두고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며 “죽은 후에도 심판이 있다”(히 9:27)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3) 용서의 기초입니다.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발견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필자는 인간성의 가장 아픈 곳을 가장 깊이 표현한 말씀은 요 1:29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말씀을 빼놓고는 어느 복음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2) 깨끗케 함 1) 깨끗케 하는 이유는, 과거에는 범죄하던 나쁜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용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깨끗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2) 인간은 제힘으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경험으로 대답을 해봅시다. 여러분은 약간 잘못된 손짓 발짓이나 행동이나 말을 여러분 스스로 치료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사소한 습관을 고치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여러분은 오늘날 까지도 이것을 거느리고 반항하는 힘을 모를 것입니다. 렘 13:33에 “구스인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있느뇨?” 3) 깨끗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사해 주시 기 위하여 죽으셨고 그리스도 자신의 축복받은 생활과 능력을 우리들에게 주시고 우리를 악에서 끌어내사 그의 선하심을 주시 기 위하여 살야나셨습니다. 결론으로 용서와 깨끗하게 함은 우리들이 가장 깊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 두 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와 정결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우리의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를 닮으려고 애쓰고 숭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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