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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닥아오는 종말 (겔 0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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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예루살렘과 유대 왕국의 파멸은 결정적이며 종말론적이라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하게 표명되어 있습니다.

1. 유대의 결정적 파멸(1-4절) 2절에 “너 인자야 여호와 내가 이 땅에 대하여 말하노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땅은 유대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의 멸망이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여 이미 결정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국가의 파멸 시기가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후의 금기 사항으로 요구된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유대는 솔로몬 왕 때부터 시작하여 유대 멸망의 날까지 계속해서 이 죄를 범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 죄 때문에 거의100년 전에 이미 멸망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왕국 유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수 없이 경고하시고 참고 기다리시나 이런 하나님의 노력이 전혀 수용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심판을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2. 유대의 참혹한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1) 하나님의 심판 원리 두 가지를 알려줍니다. 1) 하나님께서 한동안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겨 벌하지 않으시므로 그들의 소행 여하에 대해서 무관심하신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필경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며 보응하시는 한 날이 있습니다. 2) 죄인들이 범죄를 기탄없이 행하면서도 오랫동안 하나님의 벌을 받지 않으니, 그들의 죄악이 도리어 정당화되어 사람들이 가증하게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제한적으로 늘 그런 뜻이 아니고 그들이 천벌을 받는 한 날이 오나니, 그 때에는 그들의 죄악이 가증한 일로 나타나게 되어 사람들이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유대의 참혹한 파멸 1) 엄정한 심판 4절에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엄정한 눈으로 엄히 심판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심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고 계시므로 그 심판에는 추호의 오류나 억울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공평하고 완전한 평가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특징입니다. 2) 심판을 통한 죄악의 정화 4절에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가증한 죄악을 노출시키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가증스러운 모든 죄악이 백일하에 근절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죄악이 드러나고 우상들은 파멸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므로써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정화시키십니다.

3. 불같은 여호와의 심판(5-13절)

(1) 불 같은 심판(8-9절) 1) 진노의 심판 이스라엘은 심판의 때에 자신들이 구원 받으리라고 확신하였으나 본문은 오히려 그 매에 재앙이 임하고(7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실 것이라(9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9절).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으로 사람의 행위대로(8절)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와 가증한 행동을 한 자들에게는 그가 아무리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의 자녀라 하더라도 진노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자들에게 구원보다 진노의 심판을 강조했고(사 2:19-21), 아모스는 심판 날이 패역한 이스라엘에게는 재난의 날이라고 말하였습니다(암 5:18-20).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행악한 자는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구원의 심판은 비록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긴 하지만 진노보다는 사랑을 저주보다는 축복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이 악한 자에겐 진노의 심판이 되지만 의롭게 산 자에게는 심판 자체가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 예로 세상의 심판 날이 노아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었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날이 롯 가정에 게는 구원의 날이 되었으며 가나안의 여리고가 받는 심판 받는 날에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었습니다. 구원은 믿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구원얻습니다. 롬 1:17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약 2:26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곧 믿음은 입술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2) 죄로 인해 가증된 고통(5-9절) 1) 죄로 인한 고난은 종말을 초래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재앙이 찾아옵니다. 다음에는 파격적인 재앙 즉 비상적인 재앙이 찾아옵니다. 죄를 철저하게 징계하는 끝은 동시에 발생되지 않습니다. 집의 기초를 모래 위에 세운 집은 조그만 홍수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죄악의 씨를 뿌린 자는 반드시 자신들이 뿌린 씨앗을 수확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의의 끝이 달성될 것입니다. 2) 죄로 인한 고난은 그 최후의 단계에 급히 가속될 수 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유대 주변을 배회하다가 때때로 급습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호시탐탐 노리던 원수가 크게 격노하여 침범하였을 때 예루살렘의 황폐함은 가속화 되었고, 유다 국적은 돌연한 고사(枯死)에 의한 것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도 여러 가지 충격을 겪은 후에 유대에 이미 순식간에 멸망되었습니다. 여하간에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된 고통들을 경시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는 교훈을 줍니다. 가벼운 고통은 악성 열병의 공격의 징후를 보여줍니다. 죄의 결과로 찾아오는 일시절인 정신적 고난은 파멸에 이를 수 있는 끝에 대한 경고로서 인식되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죄로부터 구원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는 그의 뜻을 나타내시는 볼 수없는 사역자이신 하나님께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정한 재앙은 어떻게 일어납니까?(10-11절) 1) 그들의 정한 재앙은 우연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 재앙들은 감추어진 많은 원인들의 결과입니다. 말하자면 그 원인들의 산물인 것입니다. 인간사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불을 통과하고 물을 통과해야 한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길에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인간들이 우리의 머리 위를 달려간다면 그들은 말 위에 올려서 그렇게 하도록 부추김을 받았을 것입니다. 2) 정한 재앙은 하나님의 단순한 기분으로부터 연유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법칙에 의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와 진리 때문에 행동을 계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에 악을 벌하십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는 필연적인 운명이 됩니다. 그러나 그 통치는 합리적인 것입니다. 3) 정한 재앙은 이전의 행위의 총합입니다. 제비꽃들은 모여 그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고 밀은 모여 영양분을 공급하는 곡식이 된다고 말합니다. 제비꽃과 밀에 생겨나는 다른 역할은 그것들의 속성을 형성하고 있는 선행된 화학적 작용들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포, 고통, 상실, 폐허 등이 그 어두운 그림자를 펼치는 모든 개인과 국가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을 말해야 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한 행로를 걸었고 그로 인해서 어떤 재료를 한 곳에 모았습니다. 이 재료들은 모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을 죽이는 수단이 됩니다. 정한 재앙이 이전의 잘못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은 서서히 찾아옵니다. 죄에 대한 형벌은 확실하게 찾아옵니다. 사악한 자들의 머리에 임할 재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간섭할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4) 심판날이 임박해 오니 물질욕을 삼가라(12-13절). 바벨론이 유대를 점령하는 날에는 땅을 샀던 사람도 그것을 버리고 사로잡혀 갈 것이니 땅을 산 자는 샀다고 기뻐할 치유가 없고, 땅을 판 자는 땅을 팔았다고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환란을 당할 유대인들이 이제부터는 소유관념 때문에 염려할 것 없고 다만 그들로서는 회개하는 것만이 급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최후로 유대를 침략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간 뒤에는 그 전에 유대 땅에서 땅을 팔았던 자가 다시 그것을 반환해 받을 길이 없습니다. 기독신자는 심판날을 기억하며 사는 사람입니다(롬 14:10-11). 산과 같이 모으는 재산도 심판날에는 소용이 없고, 도리어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죄임을 증명해 줄 뿐입니다(약 5:3).물질을 소유하면 청지기의 사명만 클 뿐입니다. 1) 물질을 초월한 자는 물질이 있어도 하나님께 금사하고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욥은 물질을 초월한 자입니다. 욥 1:21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은즉 또한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아브라함도 물질을 초월한 자입니다. 그의 조카 롯과 헤어져 살 때 갈 곳을 먼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 때 롯은 에덴동산 같이 물과 들이 좋은 소돔땅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산지인 헤브론으로 갔습니다(창 13:18). 그러나 롯이 욕심으로 택한 곳이 화가 되었습니다. 2) 물질에 초월한 자는 남들을 돕기 위해 직무에 충성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청지기인만큼 남을 돕기 위해 직업을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하기 위해 손수 일한다(행 20:34-35)고 했습니다. 신자는 남에 게 주기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남을 도와주기 위해 사업하면 그 일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성공하기도 쉽습니다. 주는 것이 복이 되는 이유는 남을 주며 사는 자는 개인주의를 죽입니다. 개인주의는 사욕을 키워 자기를 해롭게 하고 인격을 파괴합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는 삶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삶은 하늘 나라의 보화를 쌓아두는 생활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자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자의 생활이기 때문에 축복받습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감사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적을 행함보다 더 귀한 일인 것입니다. 감사는 이적보다 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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