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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주소서 (겔 11: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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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에는 두드러진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출애굽 광야 40년의 역사요, 다른 하나는 바벨론 포로 70년의 역사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 동안에 하나님은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큰 뜻을 이루시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다같이 가나안 땅의 소망과 기대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광야 40년의 역사는 대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이었고 바벨론 포로 70년 역사는 쫓겨난 가나안 땅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원한 소망의 땅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땅이 다른나라 땅보다 기름지다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그 땅을 저희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언약의 땅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렇게 사모하고 동경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가나안 땅을 동경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신앙심과 일치했습니다. 하나님을 참되신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의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이 참되다는 것은 믿었기 때문에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것을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으로 믿었고, 가나안 땅을 자기들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서 평화를 누리며 산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받았으나 그의 자손들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 나그네로 지냈습니다. 40년 동안 천신만고를 겪으므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으나 안팎의 원수들로 인해 평안한 날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몇 해가 못되어 나라는 바벨론에게 망하고 백성은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치 못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준다고 했으면 줄 것이지 왜 지체만 하는가? 준다고 했으면 확실하게 줄 것이지 주었다 빼앗았다가 들여보냈다가 내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치 못 할리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의 약속과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하는 가나안 땅의 약속 사이에는 서로가 다르게 생각하는 차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에스겔 11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의 중심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겔 40:1에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 후 11년 후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겔 8:1을 보면 제 6년(포로된지) 6월 5일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환상을 보았다는 말이었습니다. 겔 11장의 환상은 8장에서 보는 환상의 연속입니다. 그러니까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지 제 6년이 되는 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5년 전” 6월 5일에 환상 중에 에스겔은 예루살렘으로 들림을 받았습니다. 환상은 무의식중에 환영만 보는 수도 있고, 본문에서와 같이 비몽사몽 간에 들림을 받아 육체적 행동으로 옮겨지는 환상도 있습니다. 에스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러 가지 형편을 목격했습니다. 예루살렘 동문에 이르러 25명의 방백들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인자야 이 사람들을 보아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었느니라 이 사람들은 성중에 악한 궤계를 베푸는 자니라 이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집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저희는 가마 속의 고기가 되리라고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25명의 방백들의 말은 예언자(예레미야, 에스겔)들의 예언을 반대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는 백성에게 너희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집을 짓고 거기 거하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이 방백들은 말하기를 바벨론에 이르거든 집을 짓지 말라 하루라도 속히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처음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 하나님의 환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불에서부터 기울어지는 끓은 가마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끓은 가마와 같이 전쟁의 불길에 사로잡힐 것을 예고하는 것이였습니다. 방백 들은 비꼬아서 말하기를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저들은 가마속 고기가 되리라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끓은 가마속 고기는 다 죽을 것이니 모든 백성 은 예루살렘을 떠나라 했습니다. 그러나 방백들은 끓지 않은 가마로 해석 하여 가마속에 있는 고기가 가장 안전하다 하여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남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오해와 혼돈이 있습니다. 방백들은 예루살렘를 떠나라고 하는 예언자를 잡아 가두고 길거리에서 죽여 시체로 거리를 채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가마가 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가마속의 고기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칼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내가 너희를 타국인에게 붙이리라 내가 너희를 벌하리라 너희가 나의 칼에 엎드러져 죽으리라.” 이유는? “너희가 나의 율례를 행하지 않고 이방인의 규례를 행하였음이니라” 언약의 땅은 언약을 지킬 때 내가 살 땅이 되고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서 언약의 땅에 살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와 같이 에스겔이 예언할 때 25명의 방백 중에 한 사람 불러다가 죽었습니다. 그것은 에스겔의 예언이 진실한 하나님의 예언이란 증거였습니다. 사 55:8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일단 약속의 땅에 살 자격이 없는 방백들을 이방으로 쫓아내고 그대신 그들이 좇겨나는 이방 땅에 하나님이 친히 계셔서 그들 중에 잠간 성소가 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아 그들 속에 새영을 부어주심으로 자기 백성을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쫓겨난 백성 중에 계십니다. 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소 입니다. 성소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 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떠나심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살아야 합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는 교회, 언약을 무시한 성전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곳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떠난 성전에 모인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합니다. 꿀벌이 분봉할 때는 일단 벌집을 떠납니다. 공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바위틈이나 나무가지에 잠시 처소를 정합니다. 여왕벌을 중심으로 일벌들과 숫벌들이 모여 하나의 왕국이 될 때 다시 벌집으로 되돌아 옵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은 변화와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믿어온 신앙 상태에서 떠나 재정비 강화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바꿀 것은 바꾸어야 합니다. 자리만 지키고 앉았으면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만 붙들고 있으면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값지고 좋은 기구로 한 번씩 밖으로 들어내고 밑자리를 쓸어내야 하는 것처럼 묵은 먼지를 쓸어내어야 합니다. 창문을 열고 공기를 바꾸고 기분을 대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흩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을 때는 “나는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들 속에 새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나의 율례와 규례를 행하게 하리라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모아 그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에는 성령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심으로 천국을 건설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국경을 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떻게 변하여 새롭게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떠나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려면 새 영을 받아야 합니다.

1. 성령을 받는 첫째 증거는 일치하는 마음입니다 일치하는 마음은 한 마음, 순수한 마음, 합하는 마음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는 사람의 마음은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거역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단순해야 합니다. 두 가지 세 가지 마음을 품는 것은 사려가 깊은 사람처럼 보이나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한 마음을 품게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마음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마음은 합하는 마음입니다. 두 사람이 모이면 두 사람의 마음이 합하고 세 사람이 모이면 세 사람의 마음이 합하고 백 사람이 모이면 백 사람의 마음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성령의 마음입니다. 합하는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합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은 두 사람의 마음도 합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99사람이 합해도 내 한 사람의 마음을 합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의 모든 마음을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할 때에 기도하므로 성령받기를 구합시다.

2. 성령받은 사람의 증거는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속마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부드러워지지 않고는 미소와 친절과 호의와 선행이 무효로 돌아가고 맙니다. 성령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돌처럼 단단합니다. 얼음같이 찹니다. 바울같이 강퍅합니다. 고집을 부리고 분을 내고 미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선을 행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마음이 부드럽지 못합니다. 선행(善行)보다 선행(先行)해야 하는 것은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백만금을 안겨주는 것보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는 인정이 더욱 값집니다. 기도하므로 성령을 받읍시다. 성령으로 돌 같이 굳은 마음이 물 같이 되고 황무지 같이 지친 마음이 양털과 같이 되기 바랍니다.

3. 성령받은 사람의 증거는 여호와의 율례를 쫓으며 여호와의 규례를 쫓아 행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를 쫓아 행할 자는 앞서 말씀드린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워지고 성령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진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받기를 힘씁시다. 성령으로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구합시다. 성령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지기를 구합시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방백들과 같이 예루살렘만 떠나지 않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을 버립시다. 마음을 새롭게 합시다. 한 마음을 가집시다. 마음을 합하여 하나가 되는 일에 힘씁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이렇지 못한 사람들은 못 웃으니 비웃는 것 같이 되었습니다. 미소는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이 밝고 부드러워야 부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처소를 정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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