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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단 범죄와 개인의 책임 (겔 18: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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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하나님 집에서 사는 백성이고 집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단으로서 여호와를 위하여 사명을 가진 국민이었습니다. 질서있는 집단생활 구조안에서 생의 파멸이 있게 되면 그것은 이어받은 죄의 값으로 나타난 책임이라고 흔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죄값은 가족 전체가 책임지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고라가 범죄하므로 모든 가족과 함께 죽게 된 일과(민 16장) 아간이 범죄하므로 모든 가족이 다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일(수7장)은 그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다 함께, 여호와께서는 위에 말한 구약시대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에스겔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만 여호와 앞에 심판을 받는 것이지 부모나 친척의 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으리라고 하며 다음의 3가지 실례를 들었습니다.

(1) 공평하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법을 따라서만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은 살 것입니다(5-9절).

(2) 아무리 부모가 선하더라도 악한 자녀는 그의 부모의 선함으로 인하여 구원받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10-13절).

(3) 아무리 부모가 악하더라도 선한 자녀는 비록 그 부모는 죽을지라도 반드시 살 것입니다(17-18절). 본문 에스겔서 18장은 당시 하나의 유행이였던 2절에 “아비가 신포도를 먹음으로 아들의 이가 시다”의 속담을 들어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인간의 책임회피에 대한 핑계를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아버지 죄로 자식은 그 죄책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가 성장하면서 저지른 과오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아비의 잘못을 따지는 격이 되기 때문에 전혀 정당치 못하였습니다. 이런 논리로 자신들의 실수를 조상들에게서 오는 유전의 결과라고 밀어붙입니다. 이런 결과는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가정 문제로 이혼했다면 자식은 결혼을 잘할 수 없고 부친이 알콜 중독자였다면 자식은 음주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누구에게 우리의 죄를 전가시키려는 심리적인 이론의 이점을 이용합니다. 그리하여 죄란 선천적인 결함이라고 구실을 붙여 가볍게 넘어갑니다. 유전에다 환경까지 덧붙이면 우리들이 잘못에 대해 어떤 것이라고 변명 할 수 있고 현세상의 상태를 인간의 죄와 이탈시켜 설명할 수 있는 이중적 구실을 마련케 됩니다. 즉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나쁜 환경과 혈통적 유약성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자기 백성 편에 가까이 있는 선지자 에스겔은 잠언을 통하여 이 문제를 뚜렷이 밝혀 놓습니다.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음으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도대체 어떻게 된 말이냐고 합니다. 논의의 촛점은 주전 6세기 초의 예루살렘은 분명히 죄없는 도성이었는데 조상의 죄 때문에 자기들이 억울한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간단명료하게 해답됩니다. 4절에 “보라 모든 영혼아 다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한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임의로 심판하십니다. 이점에 있어서 인간은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한 이어받은 유업을 넘어 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유업을 받을 수도 있게 된다고 말해서 족할 것입니다. 인간의 유전이든 자기 환경이든 간에 어떤 특수한 환경과 조건에 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초월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인간이고, 또 본능에 붙들려 있는 동물 혹은 유전적인 무엇에 좌우되는 그런 자와 구별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우리들의 배경이 어떻든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 책임을 지게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4절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즉 우리 자신에 대한 잘못에 대해서는 나의 자유의사에 따라 그릇되게 행하였으므로 도덕적 책임을 져야한다고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5-9절은 언약된대로 충성스럽게 사는 의인 범주는 규격에 짜인 도덕론을 반영시키고 있는데 이는 곧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말 것, 월경 중에 있는 여인과 성교하는 것을 피할 것, 학대하지 말 것, 빚진자의 전당물을 도로 줄 것, 가난한 자를 구제 할 것 등입니다. 10-13절은 5-9절의 내용을 뒤집어 놓은 것으로 불의한 자의 태도를 말했고 또 불의한 자의 아버지가 비록 의인이 였다고 할지라도 그 자식 이 범죄한 악인이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14-18절은 똑같은 문제를 다시 되씹어 말한 것으로 악한 아비가 남은 아이일지라도 그 아비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요약하면 범죄한 자가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간에 상관없이 죄지은 당사자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23절에 “내가 어찌하여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에스겔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때까지 이런 교훈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의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여호와께서 그렇게 세상을 판단하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관습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대하며 여호와께서는 열렬하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벌을 주기를 좋아하는 여호와가 아니다 나는 다만 벌할 수밖에 없을 때만 벌합니다. 나는 백성들이 회개하고 그들의 죄를 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백성들아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목적을 만들어라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기를 “여호와의 길이 공평치 않다”고 함은 그들이 지금껏 받아온 고난과 비극이 너무나 큰 것이었다고 생각할 때 이해할만 합니다. 예언자는 언제나 여호와의 방법을 변호하는 일과 이스라엘의 기소를 병용합니다. 선지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를 “여호와는 언제나 악인을 벌하고 의인을 축복할 태세를 갖추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에스겔을 통해 청중에게 붙이는 최후의 질문은 아주 근사합니다. 29절에 “나의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라 너희 길이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에스겔서에 있는 수많은 뜻 깊은 귀절들과 같이 30-32절은 한숨결에 어두움과 희망이 뒤섞인 말을 한 것입니다. 즉 호세야를 상기케 합니다. 에스겔은 소리내어 외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어떤 자의 죽음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자기의 피조물이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기뻐하거나 또 자기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잘 살게 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그런 하나님이 결코 아니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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