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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책임 있는 신앙생활 (겔 18: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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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핑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매우 편리하게 여겨졌고 자기를 변호하고 방어하는데 아주 좋은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불가불 자신을 핑계하게 되는 때도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향하여 책망하셨을 때 아담은 이브 때문에 따먹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이것은 핑계였습니다. 이브는 뱀의 유혹으로 먹었다고 핑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핑계는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기를 때도 자녀를 꾸짖으면 자녀는 정당한 말이라고 핑계합니다. 부모는 무조건 예 만 하는 것을 효도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순간에 많은 핑계를 하고 있습니다. 핑계라는 말을 좋게 바꾸면 이유라는 의미가 됩니다. 당연한 이유로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히 핑계가 됩니다. 이 핑계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루도 이유 없는 날이 없고, 핑계 없는 날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이것은 핑계입니다만 하면서 할 때도 있습니다. 이유나 핑계가 정당하게 인정될 때가 있지만 대개는 인정할 수 없는 경우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입니다. 핑계가 전혀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이러한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이유를 볼이거나 핑계하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하지만 모두 아담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멋진 핑계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하여 모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이것은 유대의 가장 큰 비극이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때 회개를 외쳤지만 백성들은 그를 건것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언대로 유대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통치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나라와 성전은 파괴되었고 실망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마저 약화되었습니다. 특별히 포로가 된 사람들은 외국 민족 속에서 수치를 당하는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곤욕을 치뤘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속한 사람들은 더욱 강한 신앙의 근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가 된 사람에게는 정말로 선민의 우월감은 사라지고 이제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느냐 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죽지 못해 사는 생명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원망 밖에 없었습니다. 그 원망을 하나님에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망이 조상들에게도 돌아갔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으므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무서운 형벌을 대신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래처럼 매일 모여서 계속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님께 대한 핑계였습니다. 그리하여 포로생활에서 풀려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고생하고 있는 우리를 건져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에스겔이 그들에게 예언하였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실망한 백성에게 위로를 해주어야 합니까? 사랑을 받지 못한지 오래 된 동족을 향하여 어떠한 사랑을 증거로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음성을 변화시킬까?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고 여겨질런지 모르겠습니다. 에스겔은 백성들의 생각하는 방법부터 고쳐야 되겠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들의 문제는 언제나 해결되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할 때 에스겔의 소리가 그 고생하는 동족들에게 들렸을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외쳤습니다.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비가 죄를 지었으므로 아들이 그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이 속담은 없다고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을 부정할만한 증거를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언자의 고민이었습니다. 에스겔이 그러한 고민 때문에 다른 예언자보다 더욱 힘쓴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실물로 상징적인 교훈을 많이 하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에스겔 자신이 그 포로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는 정직하게 전하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전하였습니다. “보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한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임의로 심판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점에 있어서 사람은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유전이나 자기 환경이나 어떤 특별한 환경과 조건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사람이고 또 본능에 붙들려 있는 동물 흑은 유전적인 무엇에 좌우되는 그런 것과 구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상의 유산도 중요하고 조상의 유산을 자랑하지만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고난의 역사를 사는 것도 어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현재 사는 백성들의 잘못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가정이 어려운 역경에 처하여 있음도 어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게으르고 나태한 생각과 노력이 부족한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넘기지 맙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마땅히 내가 하는 사람이 됩시다. 오늘 우리 교회가 부흥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나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지나간 세대의 책임도 아니요 어느 기관의 책임도 아니요 어느 다른 사람의 책임도 아니라 바로 나의 책임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발전하고 가정이 행복하여 지고 그 사람이 부지런해집니다. 오늘 내가 사는 역사 안에서 어느 누구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열등감을 버리고 살아갈 때 모든 일은 창조적인 새 역사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이라고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성령의 힘을 주셔서 일하게 하십니다.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연약한 자리에서 경험이 없다고 하여 주저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할 것이니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열등의식을 버립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큰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 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잠간 의롭게 살았던 자가 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할 때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국가에서 훈장을 탄 사람이 범죄하면 훈장으로 감형이 고려됩니다. 그러나 과거에 의로웠던 행위가 오늘의 죄과를 용서받게 하지 못함은 물론 그런 사람은 설혹 용서받기를 바란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는 십계명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죄를 갚되 삼사대까지 갚고 지키는 자에게는 은혜를 갚되 천대까지 베풀겠다고 하신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의 값은 자신이 받는다는 원리가 드러납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행위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 앞에 있는 역사는 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이만큼 책임있는 창조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책임을 다합시다. 다른 핑계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지 않습니다. 나의 행복은 내가 창조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이루어주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의 발전은 우리 교인들이 이루어야지 다른 교인들이 이루어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행복의 기대를 거는 사람처럼 게으른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사니까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기대는 잘못된 판단입니다. 그러한 사회의 원리는 지금까지 맞지 않았습니다. 다른 교회가 발전했으니 우리 교회도 발전될 수 있다는 기대는 필요없는 것입니다. 발전이나 부흥은 그만큼의 노력과 땀이 흐르지 않는 한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기대를 걸지 말고 나의 노력이 얼마나 집중 되느냐 하는데 모든 결과가 달렸습니다. 나의 책임있는 행동은 신앙의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일에 역행하는 일은 파괴요, 분열입니다. 힘을 합하여 주의 사업에 책임있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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