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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비극적 역사에 대한 재음미 (겔 20: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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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애굽에 포로가 되어 있을 때 야곱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언약하시고 계시하였으므로 실은 “야곱의 집”과 언약하셨던 것입니다. 이 족속의 집단이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더욱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장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계시한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 조건은 여호와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상과 다른 신을 버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 있었을 때까지도 복종하지 못했고 우상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1.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10-17절) 여호와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그 후에 내가 너희를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광야로 데려 내려왔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법령 십계명과 그 밖의 여러 가지를 내리고 또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기 위하여 안식일을 정해주었다”라고(12절, 20절)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실로 에스겔서 전체에 있어서도 가장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한 표징으로써 안식일을 정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백성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이 안식일을 기념하므로써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기억하게 하고 또한 여호와께서 안식일을 생각하실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도망할 때에 하루 밤에는 땅에서 돌베게를 베고서 지내게 되었습니다(창 28:22). 그 날 밤 야곱은 하늘로 뻗어 있는 사다리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잠을 깬 야곱은 베게로 삼았던 돌을 일으켜 세워 단을 쌓고 기름을 부은 다음 하나님께 바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 후로 그 길을 지날 때마다 그 돌을 보고 또 어디에 있는지 이 돌단을 생각 하여 하나님과 이 벧엘을 회상하기 원함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또한 하나님께서도 이 단을 보실 때마다 자기를 기억하기를 원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야곱 사이의 표징을 삼기 위하여 돌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안식일도 꼭 야곱이 쌓은 돌단과 같은 것입니다. 안식일은 곧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표징인 것입니다. “너희가 안식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나도 안식일을 생각할 때마다 너희를 생각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언제나 신자의 믿음이 식어져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제일 단계는 여호와께서 정해 놓으신 안식일을 등한시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범하게 되면 신앙생활하므로써 얻는 모든 기쁨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슬픈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세계각국 어디를 무론하고 안식일을 엄수하는 일을 만홀히 생각하는 풍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신자들이 변질하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13절에 “내가 저희에게 나의 은혜를 주며 안식일을 주었으나 이스라엘 족속이 나에게 패역하여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고 했습니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부으셔서 사십년 동란이나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 장로들이 장래일에 대하여 나에게 묻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먼저 너희 족속의 역사를 읽고 보아라 어째서 그들이 사백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고생을 당하였으며 왜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였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서 떠나서 금송아지나 또는 다른 신을 경배한 탓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너희 족속의 역사를 읽어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장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2. 광야에서 죽은 자들의 자손(18-26절) 생활 방법을 고치고 조상의 율례를 좇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라고 한 권고는 약속한 땅에 들어간 자손들에게 있어서도 한갖 헛된 권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징벌의 협박과 포로가 되게 한다는 위협도 그들을 우상숭배에서 돌려놓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리 회개하게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은 오히려 거짓 율례와 거짓 규례를 지키게 하고 또 그들의 장자를 몰렉신에게 바쳐 불태워 제사드리는 제물이 되게까지 하였습니다. 즉 그들을 이방신의 통치하에 예속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거짓종교의 위협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3. 가나안으로 들어간 사람들(27-29절)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는 또 다시 이스라엘 자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후로 그들이 그곳에 있는 악한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신도 없이 하지 않고 버젓이 그 곳 산꼭대기에 있는 잡신들을 경배하고 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으로 그들은 또 다시 고생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4.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가나안의 농사 신을 섬겼습니다(30-32 절) 그 땅에 들어온 높은 산 봉우리에서 혹은 무성한 나무밑에서 제사하는 가나안의 농사의 신을 예배하는데 유혹되었습니다. 즉 가나안 신이 그들의 예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부정(不貞)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32절에 “우리가 이방인 곧 열국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숭배하리라.” 한 말 가운데 이스라엘 역사의 전체 비극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겠다는 기회는 고난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백성이 여호와의 백성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히 유용하게 쓰실 기회를 삼으려는 데서 그러하였습니다. 여호와는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 장로들아 너희 족속의 역사를 읽고 나서 너희 형편을 둘러보아라 너희 동족들이 지금도 너희 조상들이 하던 그대로 행하여 있지 않느냐? 너희들도 여러 가지 우상을 섬김으로써 너희 자손들을 더럽히고 있지 않느냐 너희 중의 어떤 사람은 우리가 이방인, 곧 열국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숭배하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30-32절).그런즉 너희 족속의 역사를 읽어 보아라. 그리하면 오늘날에 너희 족속에게 어떠한 일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5. 먼 장래에 대한 예언(33-49절) 33-49절의 뜻을 대강 말하면 “너희는 아직도 나의 택한 백성이나 그런즉 끝날에 이르러서는 내가 다시 올 것이고 또 너희는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내게 와서 묻는 바 미구에 일어날 일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한 가지 뿐이니 곧 너희 족속의 역사를 읽어보라는 것이다. 과거에 있어서 너희 조상들이 나 여호와에게서 떠나서 다른 신을 섬겼을 때 그들의 심령 속에 죄악을 품었을 때 그들의 마음의 지성소에 나 여호와 외에 다른 것이 들어앉게 하였을 때는 언제나 내가 영광을 너희에게서 옮기었고 그럴 때마다 너희 조상은 몹시 고생을 하였느니라 그런즉 지금도 너희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너희 조상과 같은 고생을 당할 수밖에 없느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송은 제기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대로 죄를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33-36절). 그 백성들은 마치 양떼가 목자의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듯이 여호와의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겠지만 그들 중 반역자들은 모두 제거하여 버리겠다고 합니다(38절). 또 그들은 그 우거하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도 그들이 원하는 바라면 우상을 섬길 수 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발 각각 그 우상을 섬기고 난 후에도 그 우상에게 드렸던 예물을 가지고 다시 여호와에게 나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3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면 여호와께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또 거룩한 예물을 다시 제사할 수 있도록 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41절에 “하나님은 내 거룩함을 열국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만국에의 자기 계시의 목적이 설정됩니다. 이 모든 약속이 완성되게 될 때, 그 때에 백성들은 과거의 죄악을 기억하고 비애를 느낄 것입니다(43절) 그러면 이 백성들이 주 여호와께서는 마침내 자기들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시고 주의 이름을 위해 행하시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하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그의 목적과 성격에 참되신 것입니다. 결론으로 겔 18-20장의 중심 사상은 개인의 죄는 개인이 책임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지은 죄짐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나 이 교리를 싫어하는지! 그들은 언제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하던대로 “주의 하시는 일은 공평하지 않다. 여호와는 정정당당 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 변동이 생긴다. 그래서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나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죄짓기 쉬운 세상에 나게 하셔서 내가 죄를 지었다고 벌하는 것은 공평치 못한 처사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죄를 완전히 사함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러한 불평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사함받을 수 있는 길을 다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즉 이 길을 기억하고 죄에 대하여 벌을 주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이 교리에는 또한 다른 중대한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이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이였던 뉴만이라는 사람은 일척기 영국 성공회의 한 장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직분을 사면하고 카돌릭 교회로 개종하여 후에 추기경까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물은즉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로마 카돌릭 교회에서는 죄를 지었더라도 신부 앞에서 고해만 하면 다 사함을 받고 그에 대한 책임은 교회가 다 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란 이렇게라도 해서 사죄함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카돌릭 교를 믿게 되는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가 어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겠는가 하고 잠시 동안이라도 생각하여 볼 때에는 곧 자기네의 어리석은 생각을 깨닫고 그렇게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땅 위에 사는 어느 누구라도 남의 도덕적이나 종교적 문제의 결정을 그 양심 자체가 결정지을 수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하였으면 그 사람 자신만이 하나님 앞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의 선지자 에스겔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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