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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의한 자매 (겔 2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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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3장은 부정한 나라의 역사를 뚜렷한 비유로써 말해준 16장의 일부분으로 보아 거의 의심할 바 없는 장으로서 아주 심한 자극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관계를 묘사한 것으로써 결혼의 상징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 상징을 뚜렷이 이스라엘에게 적용시킨 것은 바알신에 관계된 그 유사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시대 이래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는 남편으로 생각한 것은 히브리 사상의 지도자들에게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 장에서도 하나님은 남편 구실을 합니다. 유대의 정부들은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외교관계에 있는 외국 세력들입니다. 제멋대로 놀아나는 이 여인들에 대한 상세한 징벌이 본장 후반부의 주제입니다. 비록 현대 독자일지라도 이 장에서 사용된 태연한 에로틱한 묘사에는 대개 충격을 받으며 또 부정의 환경에 처해 있는 여인에 대한 잔인하고도 가차 없는 징벌에는 충격을 아니 받을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교훈을 무게있게 하기 위하여 정상적인 사고방식에서 또 당대의 습관적인 형태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 어미의 딸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형 오홀라는 일찌기 악하게 되어 행음을 하였습니다. 그 아우 오홀리바는 그 형의 행하는 악한 일과 부끄러운 일을 보고 저도 역시 영적으로 행음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당신의 선지자들이 많이(호세아 같은 사람도) 이러한 실례를 들어서 종교적 변절을 묘사한 것은 오늘날 우리로서 보기에는 매우 거룩합니다. 남녀가 섞여 있는 회중 앞에서 간음이나 간통 같은 문제를 가지고 말하기를 원하지도 않거니와 점잖은 좌석에서 이런 말하는 것은 무례한 것으로 압니다. 또한 누구나 이런 말은 듣기도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선지자들이 이런 말을 거룩한 말을 써서 교훈한 것도 그 이유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지자들은 죄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싫어했기 때문에 그처럼 싫어한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런 거룩한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무론하고 사람은 다 죄에 대해서는 좀 더 부드러운 말로 돌려서 말하려고 합니다. 어떤 학자나 신약의 기자들은 죄라는 말을 헬라어 ‘하말티아’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고들은 말하기를 불신자인 헬라인들은 이 ‘하말티아’라는 말을 표적 ‘관역’을 맞추지 못한 것, 사고라는 뜻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범죄에 관해서는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불신자나 오늘날의 불신자들은 이 ‘하말티아’라는 말을 그렇게 해석할지 모르나 실상신약에 나타나 있는 ‘하말티아’라는 말은 분명히 이런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라는 뜻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언제나 죄악 곧 교활하고 유해하고 죄악된 행동을 표시하느라고 사용되었습니다. 요리문답에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은 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신약의 죄에 대한 사상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는 몸서리나고 더럽고 어두운 것으로써 칭찬하거나 용서 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음행이야말로 곧 이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싫지마는 할 수 없이 이런 말로 죄를 나타낸 것입니다. 본문의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한 어머니의 딸로서 어렸을 때부터 행음하여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젖가슴이 어루만진 바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애굽에서 포로 생활할 때의 부정에 관해서 언급된 것입니다. 3절에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습이 어루만진 바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3절에 철자화시킨 성교장면의 상세한 묘사는 에스겔의 말의 의미를 뚜렷이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언니가 되는 오흘라(oholah)는 사마리아와 동일시 되었습니다. 오홀라의 이름의 뜻은 천막을 가진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젊은 아우인 오홀리바는 예루살렘과 동일시되고 그녀의 이름은 그녀 안에 천막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징적인 이름은 바알 신당에 소위 성스럽다고 하는 음행 하는 장소를 설치해 놓았는데 거리에 처있는 천막을 가리키는 음탕스런 이름임에 거의 틀림없습니다. 동시에 음탕한 유대의 부정한 생활을 근본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1-4절). 두 방탕한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저희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번연히 알면서도 조금도 기다림 없이 죄짓는 길로 들어갔습니다. 선지자들은 영적 변절이 어떻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다른 신을 섬긴다든지 경배하는 것이 얼마나 좋지 못하다는 것을 똑똑히 가르쳐 주기 위하여 이런 비유들을 들은 것입니다. 다른 신이란 것은 물체에 대하여 절하는 것도 들어가거니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께서만 홀로 계셔야 할 신령한 중심에 다른 것이 들어 앉아 있게 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먼저 언니되는 여인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홀라는 여호와의 아내이었는데 그녀는 앗수르 사람과 행음하였고 또 방백과 감독과 준수하고 탐나는 소년 및 말 잘 타는 자색 옷입은 군인들과 굉장히 행음하였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유대인의 마음을 협박했지만 또한 그와 동시에 은밀히 경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따위의 부정은 그 백성에게 있어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들은 국가적으로 젊었을 때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부터 그런 모양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5-10절). 이 언니되는 여인의 부정한 생활은 비교해 볼 생각으로 설명된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사르곤(sargon)이 일을 잘 했을 때 주전 721년에 패망되었습니다. 이미 그 백성은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교도들과의 혼합종이었습니다. 그녀의 부정한 생활 기록은 가능한 죄악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오흘라(사마리아)가 과거에 부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타락한 것이 오홀리바(예루살렘)라고 말합니다. 무턱대고 앗수르를 사랑한 후 즉 그들의 생활 방법과 종교에 매혹당한 후 유대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갈대아 사람들의 신앙과 애정에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녀는 공공연히 ‘하체’를 드러내 놓고 행음으로 제 몸을 더럽혔기 때문에 마침내 여호와는 그녀를 내버리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11-18절). 예언자가 언급한 것과 그 시대의 역사적인 정황과는 결국 정확히 부합시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롱의 대상이 정치적으로 강대한 나라의 세력에 마음대로 야부당하는 유대의 부정을 지적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에스겔은 유대의 생활 양태가 애굽에서 포로 생활한 이래 조금도 변경된 바가 없다는 초기의 주장을 반복할 때 그는 액운의 각서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오홀리바의 사랑은 그녀의 남편을 위한 것이 아니였고 다만 분별력도 수치도 모르고 받아들이기만 한 수많은 정부(情夫)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 혼합주의는 도덕적 퇴보와 정신적인 파멸의 비극에도 인도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오홀리바는 이내 그 모든 여인들에게서 배반당하고 또 그녀에게서 거짓된 허위의 사랑을 받아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억울하게 느끼는 모든 정부들이 복수하려고 합니다. 바벨론과 앗수르 사람들은 같은 부정한 정부였던 이스라엘을 징벌하는데 합동작전을 합니다. 그녀는 벌거벗김을 당하고(26절) 또 여러 사람들이 보는 면전에서 코와 귀를 깎여 버립니다. 그녀의 모든 보석과 소유는 빼앗기고 또 벌거벗긴대로 보기 싫고 매력 없이, 도와주는 자도 없이 홀로 그녀는 남아 있게 됩니다. 유대의 죄의 성격은 그녀 자신이 3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들로부터 징벌을 논리적 혹은 연대적 연속성을 표시해서 언급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되는데 그 잔은 이미 오홀라가 마신 바 있는 맛과 같은 잔입니다. 그녀는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집으며 자기 유방을 꼬집고(33절) 합니다. 이것이 유대의 죄악이요, 패망의 원인입니다. 37-49절의 신탁은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이야기와는 다른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귀절들은 두 여인의 사건이 마치 동시에 된 일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으며 따라서 징벌도 두 여인에게 같이 내려지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같이 취급되고 있는데 아마도 에스겔은 이스라엘이든지 유대이든지 간에 엄격한 구별을 하려 하지 않았던 데서 그런 결과가 기인된 듯합니다. 둘다 동일한 범죄자들로서 고소됩니다.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혔고 안식일을 범하고 또 그들의 자녀를 죽여 우상의 제물로 드리는 등 그들은 범법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 거짓 종교안에 있으면서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제법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37-38절). 다시 예언자는 음행하는 여인의 초상을 묘사해 말합니다. 백성을 뇌쇄시킬만큼 미모의 단장을 합니다. “목욕하고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고 화려한 자리에 앉아 앞에 상을 베풀고 향과 기름을 놓고 무리와 편히 지껄이고 즐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기소되고 처벌당하게 됩니다. 어떤 자를 막론하고 이 두 여인과 관계한 자는 음행한 죄인입니다. 그래서 의인들은 그들을 모조리 정죄할 것입니다. “그들을 돌로 치며 칼로 죽이고 그 자녀도 죽이며 집들을 불사르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여성에게 정성의 본보기가 되게 하며 음행을 본받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에스겔은 개인이든지, 사회든 간에 한 번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게 되면 그 결과는 파멸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은 조롱당하거나 무시당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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