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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른 뼈들이 살겠느냐 (겔 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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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영원히 간직하여야할 위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에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에스겔을 이끌 어 어느 골짜기에 두었습니다. 그 골짜기에는 마른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묻기를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말라버린 해골떼가 다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에스겔은 “당신이 아십니다”라고만 대답할 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선민 이스라엘을 위한 자신의 의도를 보여주셨고 전능자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간직하여야할 생의 위대한 비젼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 무시무시하 게 흩어져 있던 불쾌한 해골떼를 보여주시면서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신 하나님의 이 질문에는 우리가 다 함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할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1.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참담한 현실을 보여 주시는 질문이었습니다 해골은 죽음이 남겨 놓은 가치 없는 물체들 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해 골을 무서워하고 그것을 보기 싫어합니다. 해골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절망의 형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거기는 윤기도 없고 부드러움도 없으며 아름다움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는 호흡도 활동도 없고 맥박도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흉체들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서로의 연락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신 우상을 섬기다가 진노를 당한 이스라엘 민족의 참상은 마치 그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방불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재생의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절망과 비애와 고통만이 그들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 하시던 여호와의 질문은 범죄한 인생들이 받아야 할 심판의 참상을 보여주신 경고입니다.

2.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 님께서 절망 중에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선민의 불멸을 약속 해 주신 질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잡혀 간 뒤, 소망을 잃어버린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스스로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 중에 처한 자기 백성에게 이 위대한 희망의 계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그들에게는 일루의 희망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인간의 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해골이 되어 골짜기를 매운 처절한 뼈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의 뼈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것들은 만인 중에서 하나님이 선발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선민의 해골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 4:31에 “네 하나님 여호와 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이 약속은 신 31:6-8, 수 1:5, 사 4:17 등에 반복되었고, 출 3장에 나타난 호렙산의 떨기나무 불꽃으로 확인된 이스라엘 민족의 영원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여기 인간의 중요성이 증명되었고 여기 설민 불멸의 신앙이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골짜기를 메운 마른 뼈들이 인간 의 해골이었기에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형태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선택받은 민족의 해골들이었기에 하나님은 거 기 관심을 가지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사 41:4에 말한 대로 비록 그들이 지렁이 같은 인생일지라도 욥 25:6이 말한 바와 같이 비록 그것이 벌레와 같고 구데기 같은 인생이라 하더라도 거기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영이 담겨져 있었고, 거기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것들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켰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영 죽을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인생을 구원해 주시려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가 죽었습니다. 해골떼와 같이 말라버리고 흩어져 버린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는 3일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약속하신 첫 열매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고전 15:20).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하신 하나님의 질문은 부활을 약속받은 기독교 신자들의 영원한 신앙입니다. 사탄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것은 그것 이 인간의 생명을 소생시키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목적 은 인간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부활의 신앙이기 때문에 사탄은 그것을 소멸하려고 최대의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 리 사탄의 권세가 강하다 해도 생명을 소생시키는 부활의 종교는 영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종교는 말씀의 능력에 의하여 전파되고 보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대언을 명령하였습니다. 에스겔은 명령대로 대언을 했습니다. 대언이란 말은 원어에 ‘나바아’로 영역에는 되어 있습니다. 영역에는 그것이 예언 ‘Prophesying’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마는 원래의 의미는 외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지는 곳에 생명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3. “이 뼈들이 살겠느냐”고 하신 하나님의 질문은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신 질문이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천지만물을 지으셨다고 선포 합니다. 말씀에 의하여 지어진 우주에는 말씀의 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것 입니다. 말씀이 역사하는 그곳에 생명의 운동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라버렸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해골떼들 위에도 말씀의 대언이 선포될 때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본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역사할 때 흩어진 뼈들이 제 짝을 찾아 연결이 되었습니다. 말씀 이 외쳐질 때 힘줄이 생기고 살이 덮이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말씀이 울리 던 순간 뼈들은 일어났고 군대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무시된 곳에 죽음이 찾아 왔으나 이제 말씀이 역사하는 그 골짜기에는 놀라운 생명의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에스겔의 대언은 이제 바벨론이란 무덤에서 이스라엘 을 구출할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대언이 로마를 변화시켰고 루터와 칼빈의 대언은 중세 암흑시대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웨슬레의 대언은 침체된 영국을 소생시켰고 존낙스의 대언이 스코틀랜드를 살렸으며 그룬드비의 대언이 폐허의 땅 덴마크를 회생시켜 놓았습니다. 계 19:10에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구원이 증거되는 곳에 대언의 영은 역사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고 보는 개인의 생명도 예수의 증거가 있을 때 살아나는 것입니다. 절망의 비극 속에 있는 가정도 말씀이 역사하는 그 때부터 살아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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