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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의 불평 (욘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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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아끼시고 멸절하시지 않음에 대하여 불평을 합니다. 그는 자기가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한 것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자비로운 처사가 필연코 있을 것을 자기로서는 내다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의 이와 같은 심리는 옛날 아브라함의 그것과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이 멸망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창 18장). 얼핏 보면 현대인으로서 요나의 이와 같은 심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패성은 선지자에게도 있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심리의 발작을 압니다. 곧 인간은 원수 된 자 꼭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심리를 가졌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인데 그것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원수들의 아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요나는 그 도시의 멸망을 보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점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좁으나 하나님의 마음은 넓기가 한량없습니다. 3절에 “여호와여 원컨데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자살을 원함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자기 생명을 죽이는 큰 죄를 범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줄 알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저에게 간구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니느웨의 구원받은 일 때문에 마음에 실망을 품고 살기를 원치 않는 심리는 그의 부패성의 발로입니다. 사람이 의분을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합당한 분노입니다. 그런 분노는 혈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 압니다. 그러나 요나는 합당치 않은 분노를 발하였으니 곧 자기의 원수 된 나라를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 때문에 분노함이었습니다.

(1) 요나는 먼저 자기 나라의 명예에 대해서 질투심을 가졌습니다. 니느웨의 회개와 개혁은 회개하지 않고 개혁되기를 싫어하는 이스라엘의 완고성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이들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총은 유대 민족에게 흉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게 된다는 암시를 받았을 때 깜짝 놀라며 “그럴 수 없나이다”(행 11:8)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이런 행위는 조금도 놀랄 것이 못됩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총애 받는 민족이 된다는 것을 심히 유감스럽게 간구한 것입니다.

(2) 요나는 자기 자신의 명예에 대해 질투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니느웨가 만일 40일 이내에 멸망되지 않으면 자기가 거짓 선지자로 간주되며 그런 불명예스런 낙인이 찍힐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런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멸망의 경고 속에는 파멸을 방지하기 위한 암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구원의 일에 이바지 하였다는 이유로 신망과 명예가 더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마음이 좁아 이런 점은 생각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예언의 외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는 새삼스럽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간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시작하며 격정을 못이겨 요나는 죽음을 소원하고 있습니다(3절). “이스라엘의 영광이 이방인에게 옮겨지는 것을 보느니 차리리 나로 죽게 하소서.”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충분치 못하여 유대 인과 이방인 둘 다는 충족시키지 못한다거나 니느웨인들이 은총 속에 영입되기 때문에 유대인은 자비로부터 더욱 멀어지기라도 하는듯한 말투입니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도 자기의 노력의 수포로 돌아갔을 때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였습니다(왕상 19:4). 더구나 이런 불평을 한 요나는 인생에 있어서 한창 쓸모 있는 시기에 살기에 적합한 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의 격분에 대해 지당하신 책망을 내리셨습니다(4절). 여호와께서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죽기를 원하며 불평했을 때 마땅히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대로 그를 쳐서 생명을 취해 가셔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황급하게도 그를 설득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기분을 호전시키시려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큰아들을 타이르는 매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 자신과 그의 양심에 친히 호소합니다. “너의 성내는 것이 가하냐? 네 분노가 합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잘 안다”고 스스로 물어보도록 했습니다. 니느웨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요나 선지자는 기뻐해야 함에도 하나님의 사자로서 기쁨은 간데없고 오히려 죽여 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유대 종교지도자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작게는 개인 관계에서, 가족 관계에서, 사회생활 속에서, 크게는 대외적인 관계, 즉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에 이러한 모양의 사랑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정치하는 이들 사이에서 이 익을 놓고 경쟁하는 사회에서 심지어는 교육가들 중에서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스포츠 문제에도 우리 민족의 혈맥 속에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무엇에나 이겨야 한다는 끈덕진 집념들은 국민적으로 요나가 가지고 있는 심리가 아닙니까? 이런 것은 선교적인 차원에서는 합당한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니므룻은 바벨탑도 세우고 요나가 갔었다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라는 도성도 건설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여기에 결론이 있습니다. 니므롯이 세웠다는 두 도성 하나는 바벨이고, 다른 하나는 니느웨였습니다. 이두 성 사이에는 기본적인 일치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벨탑은 홍수로 받은 심판을 막기 위한 인간들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회개하므로 용서함 받기 보다는 반대로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저항의 동기에서 세워졌습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간 최후의 방어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대결을 선언한 인간의 항거였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창조이지만 그 창조에는 하나님과 힘을 견주어보려는 인간의 오만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도시는 세속 도시 아닌 도시가 없습니다. 돈, 흥정, 이해관계, 무자비한 경쟁, 이것들이 한국 수도 서울에서 주름잡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니므롯이 세웠다는 니느웨성은 이스라엘을 괴혀혀 온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니느웨는 침략과 피로 먹고 사는 세속도시였습니다. 왕이든 백성이든 하나님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몇몇 개인들은 의롭고 덕이 있었으나 니느웨성은 오랫동안 뿌리박힌 사회악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니느웨는 무력으로 지탱하는 피의 도성이었습니다. 바벨과 니느웨는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한 세속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도성의 운명이 둘로 갈렸습니다. 세속도시였던 바벨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벨탑을 파괴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바벨은 남겨두시고 인간들의 언어를 혼돈 시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언어의 흔돈 쯤이 무슨 심판이냐고 속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혼돈, 같은 말을 하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의 단절은 바벨만의 비극이 아니라 바로 우리 도시의 비극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세속 도시가 심판받은 인간 상실, 언어단절의 비극이 있습니다. 언어의 단절은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욕심이 인간과 하나님을 갈라놓았고 그것은 흩어짐의 비극을 가져 왔습니다. 반대로 바벨 못지않게 세속도시였던 니느웨에 갑자기 나타난 요나의 선포,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경고를 듣게 됩니다. 니느웨 성은 오히려 백성과 왕은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금식하며 여호와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온 도시가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가 바뀌었습니다. 심판의 계획이 용서와 사랑의 계획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 도성에 사랑으로 참여해 주셨습니다. 세속 도시 니느웨는 구원받은 거룩한 도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밧모섬에서 요한이 보았던 새 예루살렘 도성은 거룩한 도성이요 아름다운 도성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도성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도성 안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저희와 함께 계신 것뿐이었습니다. 이것만이 거룩한 도성이 되는 이유였습니다. 우리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대통령으로부터 국민 전체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 그리 하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함께하실 때 세속도시인 이 나라도 육과 영이 새로운 생명, 거룩한 도성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전개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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