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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 계절 (합 0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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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에는 “무엇 때문에”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행동에 질서와 한계가 있고 절제도 생기게 됩니다. 이유 없는 행동은 무절제 하며 혼란하게 됩니다.지금은 추수 계절이며 신앙인에게는 감사 계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보다는 이유 있고 뜻있는 감사가 더욱 바람직한 것입니다. 물론 범사에 감사조건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이유가 더욱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농사가 잘되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금년은 더욱 전무후무한 장마와 태풍의 피해를 경험했습니다. 좁은 한반도의 어느 일지역만 당한 것이 아니라 전국토에 피해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신앙인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1년의 농사가 무의미하게 되고 한 해의 흉작으로 무익하게 돌아오면 우리가 감사계절에 무엇을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인생의 목적이 먹고 마시며 입고 번식하는데 있다면 흉작은 반드시 손실로서만 해석할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은 품성을 완성하는데 있습니다. 자기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무궁한 영과 접촉하며, 안으로 무궁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받는데 있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은 어떤 것을 얻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 최대 최종의 목적에 달성하기 위해서는 흉작이 도리어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육이 살찌며 영이 죽고 곡식이 창고에 가득하고 인품속이 빈다면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식은 때로 수양에 필요하듯, 흉작은 때로 각성을 위해 유익합니다. 오인의 존재 이유를 깨달을 때, 오인은 흉작 때문에 울 것이 아닙니다. 옳습니다. 울지말 것입니다. 금년 정도의 수해를 옛날 농민이 당했다면 식량란이 심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해 가운데서도 금년 가을 추수는 의외로 만족했습니다. 비 한 방울과 물 한 줄기를 막을 수 없는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고픔의 의미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오늘의 사회는 분명 축복받은 사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있습니다. 배고픔을 모르기 때문에 배고픔에 대한 고마움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민주화의 바람직하지 못한 부산물로서 많은 노사분규가 기업과 경제를 위축시켰습니다.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로서는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규가 그칠 날이 없고 푸른 제복의 전투 경찰과 젊은이들의 충돌을 안 본 날이 없는 우울한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경제가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염려한 결과는 오지 않고 파격하지 않은 노사문제로 어려움이 남겨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올립니다. 이제 감사계절 가을을 맞이했습니다. 이런 계절에 하나님께 감사표현이 몸과 마음에서부터 물씬 풍겨나는 아름다운 생활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너무 감사 표현하기가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분노, 원망과 탐욕, 그리고 위선과 싸움이 있기에 감사 마음이 생겨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감사는 근본적인 삶과 자유 영생을 얻게 해줍니다. 감사는 건강하게 살았기에, 사업이 잘되기 때문에, 자녀가 시험에 합격하였기에, 풍요한 곡식의 추수 때문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사해야 할 외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되어진 모든 일 뿐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나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자들은 자기의 청지기로서의 자각과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자들은 자기의 청지기로서의 자각과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심정으로 바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자들은 자기의 청지기로서의 자각과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심정으로 바치게 될 것입니다. 물질만능의 우상을 부수고 몸과 마음을 진정으로 제물이 되도록 제단에 드리십니다.하박국 선지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를 물질적인 조건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 소출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을지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이라 했습니다. 가난하든지 고생하든지 실패하든지 환란을 당하든지 간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참다운 감사입니다. 특별히 추수 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추수 감사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키라고 주신 세 가지 절기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출 23:14-17에 보면 세 가지 절기가 나옵니다.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이 그것입니다. 이 중 두 개가 감사절입니다. 그런데 계명과 율법으로서의 “절기지키는 일”을 주신 때는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거나 가나안에 정착한 때가 아니라 아직 광야에 있을 때, 즉 머나먼 시련의 행진을 하던 때였습니다. 이 절기는 광야에서와 가나안 땅에서 잘살게 되거든 지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은 언제나 현재적인 의미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현대적인 추수 감사절은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려엥 의해서 제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감사절을 공휴일로 공포한 것도 평화시대가 아니라 남부 전쟁을 치루고 있던 때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지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추수감사절을 지킬 것을 공포한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신앙적인 행사는 곧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절은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십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지금도 섭리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준비하신 것으로 생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마음이 없다면 이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는 죄악입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무덤 사이에 살던 귀신들린 사람이 주님을 만나자마자 외쳤습니다.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은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치료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과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치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면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게 됩니다.참 신앙은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이 없는 풍요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오히려 풍요가 타락의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때 풍요가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를 맞이하면 하나님께 감사는 잊고서 먼저 쾌락을 누릴 생각부터 합니다. 그런 사람은 풍요를 누릴 기회마저 잊어버리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 때문에 감사하며 또한 감사하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평강과 은총을 누리는 생활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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