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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산상보훈 (마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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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비단 신자 뿐만이 아니라 불신자까지라도 산상보훈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숭고하고도 심오한 교훈 앞에 찬탄과 경복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사실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귀한 문고 중에 최대의 보물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의 서곡이기도 합니다. 정말 산상보훈은 톨룩의 말처럼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입니다. 인도의 위대한 민족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비록 비기독인이었으나 평생에 산상보훈을 애독하였고, 그의 생활기본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금식, 무저항주의가 그리스도의 이 교훈에 토대를 두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멀리 떠나 있거나 또는 전연 정반대 방향에서 실고 있는 것을 종종 보는 것은 유감스러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산상보훈이 예수의 공생애 중 어느 시기냐는 문재는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5대 교훈집인 예수의 제자파송의 교훈(마 10:5-42), 천국 비유장(마 13:1-52), 갈릴리에서의 최후 교훈(마 18:1-35), 예루살렘에서의 최후 교훈(마 23:1-25, 46)에서의 순서와 내용으로 보아 역시 초기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겠고,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동일한 교훈(눅 6:20-49, 11:33-36, 12:22-34)과의 관계도 예수께서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하간 그 교훈을 주신 산의 이름까지 밝히지 않은 마태복음에 있어서 이러한 외부적인 문제는 그리 중대사가 되지 못하고 산상보훈은 어디까지나 그 내부에 실려 있는 교훈 자체의 가치로 말미암아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절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산상보훈의 서문으로써 그 환경, 대상, 방식 등을 알려주는 짧으면서 암시 깊은 시작입니다. 이 보훈이 이루어진 산이 어느 산이냐는 것에는 추측과 논의가 많고 지금도 성지를 여행하는 나그네들은 저 산이다, 이 산이다라고 하나 어느 산이든 상관 없는 줄 압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견해를 따라 디베랴의 북방 5리에 있는 헷딘산으로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산은 둥글고 산정이 두 봉으로 나뉘어 있어 마치 이 산에서 설교하신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신과 불신을 구별하듯이 되어 있고 지금도 거기에는 백합화가 피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교훈을 산 위에서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산을 좋아하셨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복음서는 예수님과 산과의 많은 관련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마 15:20, 막 3:13, 6:14, 눅 6:12, 요 6:3). 구약에서 모세의 십계가 시내산에서 주어졌고 신약의 보훈이 또한 산상에서 주어진 것을 생각할 때 예수께서는 속계를 거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때로는 그 속계를 떠나 산에 올라가시어 제자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세계의 영웅이 된 것은 그가 소년기를 콜시카의 산간인으로서 높은 산봉을 보면서 성장한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이 말합니다만, 확실히 산상에서 세상만사를 초월하는 심령으로 이 교훈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듯합니다. 2절에 “무리를 보시고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중들이란 열 두 제자에게만 한하였는지, 군중도 포함되었는지 학자들의 논란이 많은 문제이나 열 두 제자를 중심한 여러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수께서는 이 말을 산상에서만 교훈하신 것이 아리라 여러번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에게 말하신 교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앉으셔서 설교하셨다 하였으니 예수님의 태도는 조용히, 그리고 침착하게 앉아서 마음과 마음이 상통하는 설교를 하신 듯합니다. 눅 10:39의 마리아처럼 마음의 허리를 가다듬어 듣는 사람들에게 이 교훈의 진의를 알리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은 잠잘 때 잠자고, 일할 때 일하는 것입니다. 즉 잠잘 때는 잠만 자고 일할 때는 일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에만 전심과 전력을 합하여 침착히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벌써 1986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새해만 맞이하면 피차의 행복을 빌고, 건강을 빌고, 복을 비는 풍습이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흔히 복을 빌 때에 “수부귀다남하소서”라고 합니다. 즉 오래살고 부해서 돈을 많이 모으고 귀하여지며 높은 벼슬 자리에 오르고 다음에 아들 많이 얻으라는 이런 복을 흔히 빌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복인 것 같으나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수즉다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을 많이 본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부하여지면 복도 되지만 복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높은 벼슬에 오르면 보통으로 볼 때는 좋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조금 잘못하면 오히려 그 자리에 올라가지 않은 것만도 못한 때가 있습니다. 물론 아들을 많이 두면 복이 됩니다. 그러나 복이 못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도 근심걱정을 끼치게 하는 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들은 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이 있습니다. 이 여덟 가지 복은 거룩하고 영원한 복입니다. 이 복은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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