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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0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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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12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간구한 두 번째 기도입니다. 이 말씀의 해석상에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할 것이지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조건부의 것은 율법적이라고 하여 반대하는 것입니다. 시리아 역, 고대 역에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줄 수 있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고 시내산 사본도 고대의 것은 “준 것같이”라고 과거형으로 되어 있고 7세기의 것은 현재형으로 고쳐져 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도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눅 11:4). 둘째, 의문은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분야와 사람이 용서할 수 있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여하간 이 기도는 교육적인 것으로 압니다. 즉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기 전에 사람끼리 서로 용서하라는 권면입니다. 또 예수의 6계에 대한 교훈 중에도 민 5:23-24에 “예물을 제단에 바치기 전에 형제 화목을 권하고”라는 말씀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잘못된 사람을 용서하여 주어야 할 것은 교육적 의미의 권고인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마 6:14-15에 재강조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용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죄라는 어원을 먼저 파악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죄는 헬라어에 “호펠레마”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말하면 빛(부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빚이라고하는 것은 마땅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마땅히 이웃을 용서할 의무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자가 왕으로부터 탕감을 받았으나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용서가 취소되고 다시 투옥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이웃에 대한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크레솔프 장군이 웨슬리를 보고 “나는 결코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할 때 웨슬리는 “당신은 죄짓는 일이 결코 없기를 바란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즉 용서하지 않음은 죄라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느끼는 사람은 꼭 남의 죄를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다. 일만달란트 빚진 자의 교훈에서 한 사람의 몸값이 은 30(마 26:15)이니 만일 그가 금으로 빚진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 거대하여 몸을 판들 극히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자력으로는 도저히 속죄 받을 수 없는 사상을 여실히 말해주고 무조건 “빈 손 들고 나아와 십자가를 붙드매”하는 심경을 교훈해 주는 듯 싶습니다. 눅 11:4에도 주기도문이 있는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그 원어를 읽어보면「하말티아」즉 “표적에 맞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활을 쏠 때 화살이 표적에 맞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생으로써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3:4에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불법이 죄라고 했습니다. 요리문답 제 14문에서 “죄가 무엇이뇨?”라는 질문에 “죄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함이나 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롬3:10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요일 1:8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그 점을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성경에 보면 가장 성결하게 생활을 했던 사람일수록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했으며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주님 앞에 소명을 받았을 때 주님 앞에 부복하여 가로되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죄 없다 하는 자는 그 자체가 자신이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또 기억해 둘 것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죄에는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아야 마음의 평안과 참 행복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죄 사함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주님께서 당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기 위해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산상보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 속에는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2에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왜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남의 죄까지 용서해 주어야 죄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까?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주님을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사죄의 기쁨을 얻은 자는 사실 남의 죄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면 실상은 자기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고 회개치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은 우리가 속죄받을 조건인 동시에 사실상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에게도 용서를 받으며 구원을 받게 하는 길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원수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기도는(눅 23:34)그들로 하여금 “어찌할꼬”하며 회개케 하었고(행 2:37), 돌에 맞아죽으면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한 스데반의 기도는 완고한 박해자 사울을 회개시켜 사도 바울이 되게 했습니다. 이타적 정신을 고조하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남을 용서하는 기도야말로 이타의 신비경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 1:18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붉은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회개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을 받습니다.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이 사죄의 축복입니다.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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