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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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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는 하나님의 부탁이 넘쳐있습니다. 혹은 국가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부탁하셨습니다. 가령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이사야, 신약의 베드로, 요한, 바울 등은 모두 하나님의 부탁을 들었고 거기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고 위대한 일들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탁은 반드시 특수한 사람에게만 내리시는 것이 아니요, 또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신탁을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되겠습니다. 여기 포도원의 비유는 마태복음에 있는 독특한 비유로써 바로 앞 절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19:30)고 하신 말씀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집 주인은 하나님이요 청지기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품꾼들에게 대해서는 의견들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먼저 온 자는 유대인, 나중 온 자는 이방인이라고도 하고 또는 연대적으로 아담부터 그리스도까지의 인물을 차례로 적용시키며, 혹은 개인적으로도 믿을 때의 시간적인 차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1 . 이 비유는 일하라고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그것은 그때 그 사람들을 위해서는 최대의 희소식이요 복음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초대들이 있습니다. 가령 같이 놀자는 초대가 있겠고 같이 먹자는 초대, 여행을 하자는 초대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대의 초대는 일하라는 초대일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나 로마사회에서는 직업을 구하는 품꾼들과 일꾼을 구하는 고용주가 만나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오전 6시가 되면 시장에서 만난 고용주와 품꾼은 품삯을 계약하고 일터로 일하러 가는 것입니다. 일찌기 불려간 사람들은 기쁘게 갈 것입니다. 늦도록 고용되지 못한 사람은 점점 불안해질 것입니다. 여기서 오후 늦게까지 고용되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초조했으며 불안했겠습니까? 이제는 거의 체념할 무렵 뜻밖에도 부름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일하라라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품삯의 다소가 문제가 아니라 일하는 자체가 한없는 축복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분주하다고 불평을 합니다만 분주한 괴로움은 실직의 고통에 비할 수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프랭크린은 말하기를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하였고, 케네디 대통령은 최대의 행운은 자신의 전 능력을 기울여 일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자신도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설교하며 또 일했을 때에 느끼는 희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그 일에 대한 보수가 문제가 아니고 스스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나태는 신자의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 루터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의 주장 중 하나가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나 전도사직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그 직장으로 부르신 천직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신분의 고하에나 봉급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에 달려있다고 깊이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부탁하심을 믿고 우리가 맡은 직장에서 온 정성을 기울여 일하는데 인생의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2. 이 초대는 포도원으로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포도는 이스라엘 성지의 대표적 농산물 중 하나로 도처에서 포도원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에 포도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을 뜻하기도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셋째, 그리스도와 성도,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관계를 표시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포도원은 바로 우리들의 교회일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하신 말씀은 교회에서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 전도부에서 세상으로 많이 떠나는 것을 봅니다. 물론 다원화한 사회구조 속에서 사는 현대인에게는 교회를 떠나는 가지가지의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너무 바빠서, 혹은 흥미를 잃어서, 혹은 감정적 대립에서, 혹은 사업이나 결혼 문제 등을 인하여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들의 이익이나 흥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인간들의 사명이기에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에서 새로운 뜻을 발견하여 교회에서 일하여야 되겠습니다.

3. 이 비유는 현재 포도원으로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부름을 받은 일꾼은 내일을 위해 계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즉시 포도원에 들어가 그날의 남은 한 시간을 최선을 다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3)고 하였습니다. 고후 6:2에는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 로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현재를 두고 하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소망을 두고 대망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현재요 일하는 것도 현재입니다. 우리는 현재에 살고 현재에 일하여야 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산다는 말은 일한다는 말입니다. 일하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살아있다는 것은 현재에 보람 있게 일하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아침 첫 시간에 온 사람은 정당한 하루를 일하고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정당한 삯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고용된 자에게 그 한 시간은 긴급하고도 감사한 현재였습니다. 만일 한 시간이라도 고용되지 못했더라면 그는 실직자로 빈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심판적 현재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 한 시간을 시간과 품삯을 잊어버리고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무디 선생은 설교를 할 때마다 그것을 그의 마지막 설교로 생각하고 하였기 때문에 그때마다 듣는 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합니다. 옛날 어떤 왕은 신하의 편지를 받고 “내일 읽지” 하고 미루었기 때문에 그날 밤 암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편지는 왕의 신복이 자객이 오는 것을 경계하라는 경계의 편지였습니다.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고 또 반복된다고 하겠으나 진정한 현재는 일회밖에 없습니다. 현재는 긴급한 현재요, 심판의 현재요, 실로 소중한 현재인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의 말씀에 순응하여 오늘의 포도원인 교회에 지체 없이 들어가 현재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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