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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문제 (마 22: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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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고자 하여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불가합니까?”라는 물음에 주님의 대답은 로마의 동전을 보이시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무 대답도 못하고 물러섰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사두개인들은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본래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1) 부유하고 귀족들이며 친로마파들입니다.

(2) 로마 정부의 협력자요, 헬라 이념에 마음의 문을 연 자로서 소위 진보파들입니다.

(3) 성경 중 율법서만 인정하고 역사서, 예언서를 성경으로 인정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4) 헤롯파 제사장들이 많았고, 부활을 부인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은 또한 어떤 사람입니까?

(1) 친 유대 애국주의자들입니다.

(2) 유대주의자요, 보수주의적이고 율법을 생명으로 알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3) 구약성경을 다 인정하고 장로들의 유전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4) 부활을 인정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계속 갈등 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 옳다고 하고 서로를 비방하였습니다. 예수께 가져온 질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려고 가져왔던 질문입니다. 부활 후에 우리의 몸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바리새인의 질문과 본문의 사두개인의 질문이 그 대표적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부활이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예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미망인에 대해서 형제가 대신 결혼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실제 상으로는 얼마나 이행 되었는지 의심스럽지만 만일 한 남자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 가 대신 결혼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칠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 차례로 모두 결혼하였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사두개인들이 하고 질문하기를 “부활 후에 일곱 번이나 결혼한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늘나라는 장가가고 시집가며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서 중의 율법을 믿는 자들로서 성서를 인용하여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서를 통해서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부활의 하나님임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증명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부활할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은 신앙의 중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희생의 제물이 됨으로써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지은 파멸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 것입니다. 세계의 종교사에 있어서 자기희생의 자의적 죽음을 취한 종교는 없었습니다. 불교의 시조 석가는 80년 동안 가르침을 성공하고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교의 공자도 칠십이 넘어 제자들의 존경을 받으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자의적 자기희생의 죽음이었다는 데 주목 할만한 점이 있습니다. 포스딕 박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필립이라는 어린이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를 골방에 가두어 하룻밤을 지내게 했습니다. 밤 10시, 11시, 12시가 되어도 아들은 골방에서 눈을 크게 뜬 채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아래층에서는 아버지 역시 잠을 자지 못하고 자기 아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골방으로 올라가 필립을 향해 말하기를 “필립아 나는 네게 벌을 안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이 밤을 지내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아버지의 말은 필립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항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골방에 있는 아들과 함께 밤을 지새므로 공의의 사랑을 모순 없이 드러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공의의 사랑을 여지없이 성취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 문제 이상으로 인간을 괴롭혀온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다시 살 수 없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생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옛날 애굽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약을 발라 썩지 않게 피라밋 속에 보존했다든가, 진시왕이 동남동녀 3천명을 삼신산에 보내어 불노초, 불사약을 구했다는 이야기나, 한 무재가 승료반의 찬이슬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영생을 사모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줍니다. 이런 인간의 풀리지 않는 질문에 해답을 준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깨닫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 믿어서도 안 되는 사실입니다. 시인 브라우닝은 이 신비스러운 우주도 하나님 없이는 이해할 수 없으며, 인간의 정신적 만족도 하나님 없이는 있을 수 없고, 이 하나님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부활도 이렇게 이성을 초월한 신앙의 세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회교도들은 우리 기독교인을 향하여 자랑삼아 말합니다. 너희 기독교는 예루살렘에 가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없지만 우리는 맥카성에 가면 마호메트의 웅장한 무덤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여기에 회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호메트는 죽어 썩은 무덤이 있지만 예수는 부활하여 무덤이 없습니다. 김 활란 박사는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유언 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은 후에 장례식에 참여할 친구들에게 부탁하오니 슬퍼서 애통하거나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기쁨과 웃음으로 참석해 주기를 바라노라. 그것은 이 세상보다 더욱 아름답고 훌륭한 하나님 나라에 가 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의 삶은 죽음을 초월한 삶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종지부가 아니요, 보다 더 좋은 삶으로 여겨지는 이민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다음에 오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고난을 달게 받으며 먼저 죽는 일이 없이는 결코 부활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고 죽을 때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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