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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비극 (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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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신앙의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대서양의 거치른 파도를 넘어선 북아메리카의 동해안 플라바주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오늘의 미국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같은 배가 그 길로 아프리카로 가서 노예를 사서 싣고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서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미국이 흑인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은 여기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 뉴욕의 맨하탄 거리에는 1,800가지의 방언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마치 인류 전람회를 느끼는 기분입니다. 인간은 하나가 되어야 하되 쇠붙이를 녹여서 하나가 되듯이 하기는 어렵고 오직 참된 친교로써만 가능합니다. 예루살렘은 신앙의 도시요,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요, 로마는 법률의 도시였으나 인류의 미래의 도시는 형제주의와 박애의 도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들 중에는 한편으로는 신앙의 정도가 황홀에 달할 경건주의이지 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표리부동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 같은 분은 형제우애를 모르는 그런 신비주의자들을 제일 싫어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세계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아직도 물자가 넉넉하나 모든 사람의 탐욕을 위해서는 넉넉지 못합니다. 오늘의 문제는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지키려고 할뿐 아니라 못 가진 자의 것까지도 빼앗으려하고 또 못 가진 자들은 가진 자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 위에 종교, 의무 위에 사랑을 믿고 실천하는 진실 된 크리스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의무는 자기에게 요구된 것만을 행하나 사랑은 자기에게 가능한 모든 일을 행합니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게만 사랑을 주는 그런 사랑이 아니고 무가치한 자에게도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주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아가페의 사랑을 반영하는 사랑입니다. 고전 13:4-7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故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남겨 놓은 유명한 말을 되새겨 봅니다. “그러므로 나의 동료 아메리카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나라가 그대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묻지 말고 그대가 그대들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물어 보라.” 사람들은 자기의 위치를 모르고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며 스스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그대가 기도하는 것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성경보다 신문읽기를 더 좋아하며, 성전보다 자기 집을 더 좋아하면 이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증거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마음을 찢어 회개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원하며 얼마나 원하느냐에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랍비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결실을 맺지 못한 사실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입니다.

1. 열매 없는 신앙은 거룩한 비극입니다 버나드쇼는 말하기를 “내 생활에는 두 가지의 비극이 있다. 그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오는 허무요, 다른 하나는 끝내 이루어 지지 않을 때 오는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세모의 고개턱에 오르며 허무와 절망의 생각으로 더듬어 지난날을 되씹어 봅니다. 기독교인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전도의 열매입니다. 회개의 열매 (눅 3:8)입니다. “나”라고 하는 “신앙의 나무”는 살아오면서 베다니 길가에 잎만 무성하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아니었습니까? 심판의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거룩한 비극으로 마감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 속화된 신앙은 거룩한 비극입니라 속화란 세속주의를 말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수히 그대로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속”된 것을 섞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1) 예수를 적당히 믿어도 된다는 생각은 속화된 신앙입니다.

(2) 기독교도 타종교와 공통하니 어느 종교이든 믿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도 속화된 신앙에서 나온 말입니다.

(3) 내세야 있든 없든 상관할 것이 아니라 수양 삼아 믿는다는 생각도 속화된 신앙입니다. 현대에는 과학이라는 합리주의와 세습적인 향락주의가 신앙을 속화하려 듭니다. 무신론, 현대주의, 잡다한 신비주의, 이단, 신흥종교들도 오늘의 우리 신앙을 먹칠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과 말씀중심의 정통 복음으로써 속화 신앙을 방지해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이며,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때문에 구원의 복음의 길도 하나입니다. 중심이 흔들리면 만사가 흔들립니다. 복음의 진리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진리) 없는 신앙은 거룩한 비극입니다 주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본문에서 일곱 가지 화를 말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고 가혹한 책망을 내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계의 지도자들입니다. 율법(성경)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율법 속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신앙은 진리가 함께 하지 못한 허수아비 신앙으로써 신도를 우롱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는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고 일곱 차례나 화를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그 동기는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의 신앙이 형식으로 흘렀기 때문에 예수께 저주를 받는 인물들이 된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이 되지 않게 하소서”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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