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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라도 법정에 서신 예수 (마 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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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범법자에게 필요하고 재판장은 공의로써 정확한 판결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범법자는 법과 재판을 싫어하나 의인은 법을 즐기며 재판을 통하여 상선벌악의 진리를 찬양할 것입니다. 의와 불의를 판단함이 재판의 목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악과 진실을 명백히 하는 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판이 항상 완전한 공의의 재판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 유명한 천문학자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한다 하여 사형을 선언한 로마 법왕의 판결과 이신득의의 교리와 진리를 가진 성서적 신앙의 용사 마르틴 루터에 대한 판결, 그리고 고금을 통하여 진리에 살고자 하는 허다한 성도들이 거짓된 재판을 통해 순교를 당한 것은 그 실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약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공평한 판단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세상의 모든 사리와 사건을 똑바로 밝히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법과 재판인 것입니다. 대개 재판석상에서는 원고와 피고 양자간에 논쟁이 있고, 증명에 애쓰고, 변론을 통해 피고는 무죄를 주장하고, 원고인 검사는 유죄의 사실을 역설 주장함이 세상 재판의 상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재판석상에서 묵묵히 무언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일언반구의 변호를 하시지 않은 주님의 모습을 성스럽다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빌라도 법정에 서신 예수 사 53:7에 “저가 압제를 당하고 괴로울 때에 그 입을 열지 아니함이 마치 사지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양이 잠잠함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아시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당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송사하여 로마국의 총독 빌라도에게 제재를 요청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 된 일입니까? 죄인이 성자를 판단하는 몰염치한 철면피 인간들의 소행은 역사상에 대서특필할 사건입니다. 주님은 이제 재림 시 심판주로서 오실 존귀하신 몸이신데 죄인인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국의 일면은 로마국에 속하고 종교적으로는 유대 나라에 속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유대 지도자 제사장의 무리들은 예수께 대한 사형을 인준받기 위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옮겨 갔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의 치안을 위하여 일시 예루살렘에 와서 있는 듯합니다. 그는 어떤 위인입니까? 빌라도는 불의한 법관입니다. 예수가 무죄한 줄을 알면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잡아온 줄을 알면서 옳지 못한 재판을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비위를 거슬려 잘못 처신했다가 데모가 일어나면 자기의 지위가 떨어질까봐 적당히 타협을 하면서 불의를 행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불간섭하는 태도를(요 18:31) 택했습니다. 두 번째는 유월절 특사를 핑계로 예수를 내주려고 바라바와 예수 중에 하나를 택하라하며 타협안을 내어 놓았습니다(마 27:15). 세 번째로는 채찍질이나 하고 놓아 보내려고 채찍질과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들에게 보이며 연민과 동정심에 호소도하여 보았습니다(요 19:5). 법과 권세를 가진 사람으로 죄가 있으면 정죄하고 무죄하면 놓을 것이지 타협이 무슨 타협입니까? 빌라도가 두려워하며 거리끼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공갈이었습니다. 즉 빌라도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사실로 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겠다는 공갈입니다. 또 하나는 유대인의 데모입니다. 빌라도가 아무리 말하여도 유대인의 태도는 누그러지지 않자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무죄한 의인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이면에는 무엇인지 컴컴한 무엇이 있던 것 같습니다. 공정하고 깨끗한 행정가라면 데모가 무서울 것이 무엇이며 유대인의 진정서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빌라도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요 숨은 생활이 깨끗지 못한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인간이 재판 자리에 앉고 예수가 그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잠했습니다. 본문에 기재된 사실처럼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자기 권력으로써 의인 예수를 무죄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제사장들의 요구에 응하여 무죄하신 예수를 십자가형을 내린 것입니다. 의를 의로 판결치 못하고, 악을 악으로 판단치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의로우신 예수님을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사실 빌라도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진리도 없고 정의도 없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입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권세일 뿐입니다. 그에게는 자기 안전이 있을 뿐이요, 그 위에는 로마 황제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전을 위해서는 무죄한 의인 하나쯤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진리이시요 사랑이신, 즉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과는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마침내 빌라도의 양보로, 유대인들의 승리로 예수께서는 십자가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이 없이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무리들은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는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주니라.”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스스로 무죄하다고 주장하며 죄를 전가한다하여 그 죄가 해결되겠습니까? 그 후 이천년간 오늘까지 성도들은 예수는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신앙고백 합니다. 예수의 고난은 그 잘못 재판이 빌라도에게 있다하여 예수께 저주받은 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후손이 저희들 말대로 나라는 망하고 국토는 빼앗기고 이천년 동안 천하에 유리하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억울한 살육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빌라도와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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