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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리마대 요셉 (마 27:5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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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조롱과 모욕, 욕설과 저주의 아우성 속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하는 일에서 발견되는 숨은 제자들의 미담 한토막이 오늘 우리에게 뜻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금요일, 십자가상에 돌아가시는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희비의 엇갈린 감정을 안고 뿔뿔이 흩어져 갔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때와는 달리 실망과 공포에 싸여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해는 저물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규례에 의하면 해가 지면 안식일이 되기 때문에 예수의 시신도 곧 모셔 장사지내야 했습니다. 즉 수난의 금요일, 해가 지기 전에 주님의 시체는 어디엔가 매장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그가 오실 때에도 태어날 장소 하나 없었는데 이제 돌아가신 후에도 무덤 한 칸을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시고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는 한자리 해보겠다고 서로 다투며 벼르던 제자들도, 시신에 대하여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는 주의 친척들도 이 일을 위하여서는 성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니 모두 비굴해졌습니다. 그에게 병 고침 받은 무리가 부지기수요, 따르던 제자가 십여명이요, 형제들도 몇 사람이 있건만 그들은 다 어디에 숨고 임자 없는 시체 위에는 넘어가는 석양빛만이 홀로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유해를 인수하여 장례를 해드리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새 무덤을 제공한 것도 고마왔지만 제자들까지도 숨어버린 이 험악한 시간에 장례를 책임지고 나선 그 용기와 신의는 더욱 가상합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의 제자로 자처하지도 못하고 숨어서 믿던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과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기록들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갈릴리에서 온 여자 신도 몇 명만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용감히 나섰습니다. 요셉은 값진 세마포를 사가지고 와서 갈기갈기 찢겨지고 상하신 주님의 시신을 싸고, 니고데모는 귀한 몰약을 섞은 향유를 가져다가 주님의 상처 입은 몸에 바르고, 친히 주님의 몸을 메고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를 위하여 파놓은 돌무덤을 향하여 가는데 두 세 사람의 여인들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제하며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단조로운 장례의 행렬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고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뜻있고 교훈에 넘치는 장례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 그의 이름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열두제자의 명단 속에는 끼어있지 않은 이름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달리 그의 이름조차 별로 찾아볼 수 없는 낮선 사람입니다. 그가 산헤드린 회원이요, 당대의 부자였던 것은 확실하지만 열두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닌 것도 또한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란 스승을 배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생의 지식뿐 아니라 선생의 마음과 정신과 생활을 배워 그가 선생처럼 살 때에 그는 참 제자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는 예수의 제자임을 자처하고 예수를 혼자 믿는 것 같이 말하면서 그 생활에는 예수가 없고 그 처사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도무지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를 참된 제자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레위인처럼 성경에는 능통치 못하고, 제사장처럼 율법에는 익숙치 못해도 그들이 저버리고 간 생명을 구해준 사마리아 사람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일 것이며, 그리스도의 시신에 대해 장례식을 정성스레 치른 아리마대 요셉이 제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드러난 제자는 아니었으나 마지막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는 어려운 일에는 담대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체면도, 위신도, 유대인의 멸시와 증오도, 관헌의 박해와 자신의 생명까지도 개의치 아니하고 빌라도에게 나아가 주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하여 허락받았습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주님의 시신을 고운 세마포로 싸매고 자신을 위하여 많은 돈을 들여 준비해 둔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존경하던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을 보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영웅들의 모습처럼 체념 속에 운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염세주의자들처럼 생을 비웃어버리는 태도는 더욱 아닙니다. 참 인간으로서 죽음의 가장 비통한 경험을 맛보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 인류를 위한 속죄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성취와 승리와 복종의 기상을 지닌 채 운명하신 것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요셉은 그분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 영원한 소망을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으심에서 발견하고 최대의 경의와 정성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모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몸을 모시는 또 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몰약을 섞은 향유를 백 리쯤 가지고 와서 부패하게 된 주님의 시신에 발라서 썩지도 않고 냄새나지도 않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냄과 관련하여 또 한 사람의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있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 받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은혜에 감사하여 부활의 첫날 새벽에 마리아는 두려움과 수고로움도 잊어버리고 향유를 가지고 일찌기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 그것 때문에 자기의 연약함도, 두려움도, 고통도, 더러워짐도 잊어버리고 가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무릎이 깨지고 몸에 상처를 입어도 이를 개의치 않고 주님의 몸을 모시겠다는 일념 하에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도 이 둘과 같은 봉사자가 우리의 교회에 절실히 요청됩니다. 여러분께서 다 이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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