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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능성을 찾는 지혜 (막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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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가장 나쁜 독약입니다. 한 문이 닫혔으면 다른 문을 열고 나갈 길을 찾아야 옳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중풍병자는 낙심을 하지 않습니다. 병을 고쳐 보려고 모든 노력을 다해 보는 것입니다. 백약이 무효이었지만 절망은 아직 이릅니다. 계속해서 가능한 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불가능에 직면합니다. 어떻게 예수께 나가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로 가면 살 길이 있으리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며 날개도 없는 그로써 무슨 재주로 예수께로 가겠습니까? 그러나 네 친구의 도움으로 들것에 몸을 의지하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두 번째의 불가능을 극복하고 예수께 나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의 불가능이 있었던 것입니다.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과 밖으로 초만원인 그 곳에는 이 중풍병자를 위해서 비워둔 자리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리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단념하고 물러갈 수 없습니다. 기어코 또 하나의 가능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찾아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길인데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예수님의 앞으로 달아 내리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 그 승리! 이에 예수께서 이 중풍병자가 바라는 건강의 축복 외에 사죄의 축복까지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놀라운 축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역사는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싸움을 싸웁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영원한 승리를 위한 인간의 싸움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무엇을 기록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방해되는 세력과 싸우는 투쟁의 기록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 사백 오십 명, 아세라 선지자 사백 명과 싸운 것을 비롯해서 다니엘이 사자굴에 갇힌 일, 스룹바벨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한 일, 예수님의 공생애, 베드로와 열두 제자의 전도, 사도바울의 고난의 전도여행, 초대교회의 핍박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 백년의 교회 역사에 토마스, 한경희, 주기철, 손양원 등은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왜 그들은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까? 첫째, 그들은 사명을 가지고 그 위에 섰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은 믿음의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들은 가능을 찾는 슬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가능을 찾는 슬기를 보여 주고 있으며 적극적 사고로 가능의 길을 연 예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제한성을 말해 줍니다. 이 제한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소극적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반면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또한 말해 줍니다. 여기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잠 16:1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수고는 사람이 하지만 그 수고의 열매를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불가능한 인간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가능성이 활동할 때 우리는 슬기롭게 이 가능성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브리테니커 사전을 경이적으로 많이 판매한 그 회사에서는 세일즈맨(sales man)에게 강한 신념을 주기 위해 브리테니커 사람의 신조를 만들어 하루 사십 번씩 외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신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는 적극적이다.

(2) 나는 합리적이다.

(3) 나는 부지런하다.

(4) 나는 끈기가 있다.

(5) 나는 목표가 있다.

(6) 나는 나의 능력을 믿는다. (7) 나의 일은 자랑스럽다. (8) 나의 일은 나라에 공헌한다. 이런 여덟 신조를 주문처럼 수백 번 외우면 자기 암시 작용에 의해 놀라운 성적을 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신조는 세일즈맨 뿐 아니라 선교의 대열에 선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한 인간의 개성적인 힘, 둘째는 자기 아미적인 초능력의 힘, 셋째는 믿음의 힘입니다. 여기서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몇 백배 강한 힘을 갖는 것은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목표는 선교에 있습니다. 이 선교는 우리가 가능성을 향해 눈을 돌릴 때 그 길이 열립니다. 옛말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 길이 있는 곳에 빛이 있고 빛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한 목표에 집중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취에는 끈기가 필요하며 승리에는 인내가 요구되는 법입니다. 불굴의 투지가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칠전팔기의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영광스런 월계관을 쓸 수가 있습니다. 한국인은 높은 듯을 곧잘 세웁니다. 그러나 이 높은 뜻을 쉽게 달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부패가 생깁니다. 교회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선교의 높은 뜻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이 문제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떠나 혹은 하나님이 섭리를 떠나 어떤 풍문을 통한 선전이나 개인의 인기 혹은 무당식의 신비적 방법으로 쉽게 선교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합니다. 간절한 눈물의 기도와 땀 흘리는 희생과 믿음의 훈련 등 이런 고정을 통해 선교의 목표를 달성해야 할 줄 압니다. 엘리 박사는 육백 여섯 번의 끈질긴 실험 끝에 매독 치료약과 살바르산을 발명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육백 육호라 합니다. 뉴톤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만 곰곰이 생각하다가 만유인력을 발견했습니다. 게으른 자는 결코 영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노라”고 했습니다. 하 나라가 흥할 때는 반드시 흥하는 요인이 있고 한 나라가 망할 때는 망하는 요인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경우도 그렇고 교회의 경우도 그렇고 사회단체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 학자인 토인비 박사는 말하기를 흥하는 민족은 반드시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왕성한 활동력이요, 둘째는 단결력이요, 셋째는 진실한 국민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교회의 부흥에도 해당하는 요소라고 봅니다. 이 세 가지의 부흥의 요소 중에서 존문이 주는 교훈은 곧 협력입니다. 인생에도 항상 세 가지의 조력이 있습니다. 자조와 호조와 천조입니다. 자조는 스스로 돕는 것이요, 호조는 서로 돕는 도움이요, 천조는 하늘이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위에서 자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공동목표인 선교의 문제를 실현하기 위해 상호조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 역사하며 도와주십니다. 목사는 교향악단의 지휘자요, 교회의 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먼지 묻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종이요, 평신도는 세속의 여행길에 발에 먼지가 덮인 성자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나 평신도 간에 구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협력하는 곳입니다. 잘 되어도 잘못 되어도 함께 책임을 지며 영광과 수치도 함께 받는 협력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내 의견만 옳다든가 내 생각대로 해야 한다든가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또 무관심도 금물입니다. 나는 간섭을 안 할 터이니 네 생각대로 해보라는 식의 사고방식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엡 4:16의 말씀과 같이 모두가 사랑과 용서 가운데서 스스로를 세울 때 교회는 부흥됩니다. 사도 바울은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방청석에 앉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연히 이 땅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무의미한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비를 가지고 청소하고 복음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명자로 살아야 합니다. 가능성 위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협력해야 합니다. 그 힘으로 지붕이라도 뚫읍시다. 그래서 복음의 이 땅에 씩씩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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