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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의 비밀 (막 0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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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밀이란 단어는 헬라어로는 우리말과는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어감이 가지는 무언가 복잡하고 신비적인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희랍어에 있어서 비밀은 그 의미에 대하여 초보적 지식이 없는 사람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그러나 초보적 지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의미를 확실하고 단호하게 알 수 있는 그러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멀리 있는 난해하고 심원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예수에게 주지 않는 자에게는 전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지만 오직 예수를 선생과 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11절 이후에 이어지는 부분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표면적 가치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마치 예수가 비유로 가르치는 것은 고의로 그의 뜻을 숨기고 보통의 남녀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진리를 숨기려는 것도 아니요 뜻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에게 진리를 이해시키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사 6:9-10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70인 역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둔감하게 하며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뜻으로 번역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둔하여져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명백하게 깨닫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의 눈 속에서 둔하고 이해력이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편견으로 눈이 어두웠고 절망적 생각 때문에 귀가 멀었으며 너무 게을러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너희가 일찍이 이사야가 말한 것을 기억하느냐 이사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으나 그들은 둔하여 이해력이 없었다. 오늘 내 느낌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눈멀게 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숨기는 분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현명한 교사와 현명한 학습자(33-34) 예수께서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교훈하심은 현명한 교사의 현명한 학습자에 대한 교육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능력에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현명한 교육에 첫째로 중요한 것입니다. 현명한 교사에게는 피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교사는 자기선전을 피해야 합니다. 교사의 의무를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에 주의를 끌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선전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에게 진리를 희생시키고 재치만 번뜩이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 자체에 대한 것보다 그것을 말하는 방법을 재치 있게 하려는데 더 마음을 쓰게 됩니다. 혹은 자기의 해박한 지식을 보이려고 욕망이 지나쳐서 그의 말은 불명료하고 너무 자세하여 오히려 복잡하게 됨으로 그 결과 보통사람에게는 도리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되고 맙니다. 청중의 머리를 스쳐가기만 하는 말은 효력이 없습니다. 좋은 교사는 주제를 사랑해야 하며 결코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2)교사는 우월감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정한 교육은 사물을 사람들에게 말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그 사물을 같이 배우는데 있습니다. 교육이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은 플라톤의 이론입니다. 단 위에 서서 내려다보면서 말하는 교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은 진리를 함께 분담하여 발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영역의 합동적 탐구입니다.

3.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이 획득하여 유지하기를 원해야 할 성질이 있습니다.

(1) 교사에게는 이해력이 있어야합니다. 전문가의 최대의 곤란한 일의 하나가 사물을 이해하며 또는 행하는 일이 미숙한 사람에게 어떤 일을 이해시키고 실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지식이라고 그것을 설명하여 전하기 전에 교사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학습자의 마음이 되어서 생각하며 학습자의 눈이 되어서 보는 것입니다.

(2) 교사는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유대인의 랍비 ‘힐렐’은 “성급한 사람은 가르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사의 첫째 되는 요소는 냉정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어떤 교사는 학생들이 사물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되면 원망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초조하게 여기지도 말며 그것을 전부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한 일입니다.

(3) 교사는 친절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의 교육의 규칙은 지나친 말을 모두 금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학생을 부끄럽게 하는 모든 처벌을 금하였습니다. 교사의 임무는 항상 격려하는 것이며 결코 낙담시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사에 있어서 기운이 빠져있는 학생에게 심한 비난의 말을 던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이러한 학생에게 비꼬는 말을 한다든지 웃음거리를 만들어서 값싼 승리를 얻고자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유혹입니다. 친절한 교사는 결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4. 현명한 학습자

(1) 현명한 학습자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들은 말을 재고하고자 합니다. 그는 그것을 소화하기까지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명한 스토아학파의 교사 에픽테투스는 철학에 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배운 철학을 말하는 일에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하여 살아야 하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그는 자연생활의 간접적인 비유로 “양은 먹은 풀을 얼마만큼 먹었나를 목자에게 보이려고 토해 내지는 않는다. 양들은 그것을 소화하여 털과 젖을 만들어 낸다”라고 말했습니다. 학습자는 그가 배운 것을 잊어버리기 위함도 아니고, 또 배운 것을 보이기 위함도 아니고, 그것이 인생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나, 또 그가 살아가는데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나를 이해할 수 있기까지 조용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2) 현명한 학습자는 선생의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난 후 군중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머무르고 예수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은 적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뜻을 그들에게 밝혔습니다. 요컨대 만일 어느 사람이 진정으로 훌륭한 교사라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교훈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인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항상 그의 말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 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우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는 배우는데 그치지 않고 인생 자체까지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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