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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벳새다 군중과 주님 (막 06: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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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련한 벳새다 군중 때는 주후 30년 4월, 곳은 벳새다 광야였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고향 벳새다가 아니고 갈릴리 건너편 주리아스 벳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둘씩 세상에 보내어 전도하고 돌아온 다음, 막 6:14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세례요한의 순교의 소식을 듣고 많은 타격을 받은 다음해에 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잠시 동안 쉬기 위하여 배를 타시고 갈릴리 건너편에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보다 먼저 배를 타지 않고 도보로 예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이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쳤습니다.” 벳새다 광야에 예수를 찾아 나온 무리들은 분명코 가련한 무리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로마의 문명과 히브리의 문명으로 화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시설과 발달된 문화에서 행복과 만족과 활로를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지도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빌라도 로마의 관리들, 대제사장, 수많은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 교법사, 교의회 회원, 엣세네파, 사두개인, 장로들이 꽉 찼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설과 운명과 지도자들이 저들에게 만족과 행복과 살 길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들들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거치른 광야에 예수님을 찾아 벳새다 빈들로 나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과학, 문학, 경제, 정치, 종교, 모두가 발달되었습니다. 또 지도자도 많습니다. 학자, 재산가, 정치가, 법률가, 사회사업가, 교육자, 과학자, 종교가 등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만족과 행복과 살 길을 주지 못합니다. 서울의 생활이나 농촌의 생활이나 한 가지로 우리에겐 구원의 시대 모습이 아닙니다. 이러한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벳새다 광야의 군중과 마찬가지로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2.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예수님은 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롬 12:1에 보면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셨고 또 시편에서는 “아비가 그 아들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로써 태우시는 대심판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찾아 가신 우리 주님은 우셨습니다. 나귀를 타시고 왕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가련한 상태를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세계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불쌍히 여기사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을 때에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심지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 오른편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예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3. 먼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행 3:6에 보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하였습니다. 벧전 1:24-25에 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늘나라 복음이 필요하고 정신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김구 선생의 말에 의하면 “하나의 경찰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워라”고 하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하였습니다. “이 땅에 양식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근이라”고 했습니다. 마 4:4에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제 5공화국으로 정치, 제도, 기구, 법률, 사상을 다섯 번 바꾸어 놓았으나 정신은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정신의 무장이 필요하고 복음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가련한 백성에게 복음을 외치는 복음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4. 육신의 양식도 주시는 주님 우리의 주님은 벳새다 광야의 가련한 군중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주실 뿐 아니라 굶주린 저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담, 하와를 위해 에덴동산에는 풍성한 과실을 준비해 두셨고 광야 사십 년간 만나를 주셨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도록 풍성히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 독생자를 주셨으며 만물을 필요한대로 주십니다.

5. 제자들에게 일을 맡겨 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협조를 구했으며 동역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열두 제자를 택하셨고 이방 전도를 위해서 바울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령을 보내사 구원의 사업을 계속하시며 우리의 협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6. 어린 아이의 드린 작은 떡을 축복하신 주님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물질적으로 그 가치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신앙적으로 판단하사 귀중히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은 가난한 주부의 엽전 두 푼과 사렙다 과부의 적은 지성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칠 때 하셨습니다. 곧 물질의 다소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정신 문제요, 신앙 문제인 것입니다. 7. 기적을 행하신 주님 주님의 하시는 일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모두 기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적과 기사를 행하십니다. 어린 아이의 손에 있던 오병이어 위에 우리 주님이 축복하시고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시니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갈멜산 엘리야의 제단에 이적적으로 불을 내리셨고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에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매 기쁨이 되었고 죽은 나사로를 사흘 만에 살리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이적입니다. 오늘도 이 땅 위의 교회 위에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이 필요합니다.결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이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련한 상태를 비관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갑시다. 적은 것이라도 바칩시다.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사 축사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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