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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깐의 휴식 (막 06: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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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휴식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무더운 여름철이 다가오면 교역자의 회의도 모이지 않고 쉬게 됩니다. 그의 열두 제자가 파송을 받고 각처에서 전도한 다음에 들어 와서 주님께 보고 드렸을 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그 동안 많이 수고하였으므로 좀 쉬어야겠는데 이곳 가버나움은 휴식할 환경이 못 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 와글와글 들끓기 때문에 그 주변에서는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을 만큼 잠시도 쉴 짬이 없을뿐더러 쉴만한 환경도 못 되는 까닭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극성맞은 군중들은 육로로 더 빨리 가서 그들을 기다렸으므로 결국 모처럼의 휴식의 기회는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휴식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듣고자 합니다.

1. 근로와 휴식에 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하고 돌아왔을 때 “즉시 쉬어라”고하셨습니다. 이는 근로와 휴식의 상관성을 말해 줍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유한한 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유한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합한 일과 적당한 휴식은 필요합니다. 아무에게도 불면, 불휴의 노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노동은 창조의 기쁨이 용솟음쳐야 하는데 불면, 불휴의 노동이란 바로 지옥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는 고린도 왕이었는데 죽은 후 지옥에 빠졌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둥근 어떤 바위를 산 위의 정상에 놓는 일입니다. 힘을 다하여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흘러 떨어지고 맙니다. 즉 그는 불면, 불휴의 영원한 노동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입니다. 성경은 휴식을 제도상으로 보장했습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 규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일의 첫 번 시행자는 하나님이었고 이 명령을 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레 날은 쉬셨습니다. 이처럼 근로와 휴식은 상관적입니다. 또한 양식은 영적으로 볼 때 천국 영광중의 영원한 안식을 의미합니다. 히 4:3에 보면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고 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여 안식일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성공적이고 능률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세상에서 외치고 피곤하여진 군중들이 교회에 나와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게 되고 그 힘으로 다시 활기에 찬 주일을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모든 가족들의 즐거운 휴식처로써 가정이 있습니다. 피곤에 젖은 가족들이 새로운 에너지를 가정으로부터 혹은 아내, 그 어머니로부터 공급받는 경우와 같습니다.

2. 휴식할 환경에 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쉬어라”고 하시면서 ‘따로 한적 곳에 가서 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효과적인 휴식은 장소와 환경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휴식을 원하는 자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시달린 사람일 것이고 그에게는 사람들과 분리된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 한적하고 조용한 환경을 좋아하셨고 자주 찾으셨습니다. 막 1:35에 보면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마 14:23에 보면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라고 했습니다. 특히 오늘의 사회 환경은 말할 수 없이 분주하고 복잡합니다. 모두들 일에 짓눌리고 쫓기면서 조용한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일에 대해서 권태를 느끼게 되고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고 창조적이기보다는 기계적이 되고 의욕적이기 보다 수동적이 되고 맙니다. 일에 시달리고 분주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분간하지 못하고 일과 자기가 하나로 여겨집니다. 이때 휴식을 통해서 일과 자기 자신이 별개의 것임을 자각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늘의 음성만을 들을 수 있는 조용한 영교의 밀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위대한 이념과 씨름할 수 있는 한적한 창조의 밀실, 밀폐된 환경의 조용한 서실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요청되는지 모릅니다. 극히 단조로운 것 같을지라도 이것만이 지겹고 권태로운 생활환경과 비능률의 노력에서 우리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는 말은 결코 돈을 많이 들여 잔뜩 기분내라는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휴식 시간에 주로 쉬고 기도하고 명상하셨습니다. 언제나 분주하기만 하고 휴식할 줄 모르며 조용한 곳을 찾아 자기를 정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조만간 쓰러지고 맙니다. 새로운 것을 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창조적 기수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은 누구든지 완성품이 아닙니다. 따라서 과로하면 안 됩니다. 과로, 과음, 과식… 모두 온갖 병들의 원인이 됩니다.

3. 휴식의 의미에 대하여 요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소창을 많이 하는데 이 말 뜻은 한문대로 새기면 “창조를 소생케 한다”는 말이 됩니다. 영어로는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이라 하는데 글자 뜻대로 하면 ‘재창조’라는 말입니다. 창조 능력을 소생시킴으로 다시금 창조 능력을 가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락하고 휴식함은 그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해 버리는 그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의미 있게 관리하므로 정체된 창조력을 소생시키고 재창조를 위한 새 힘을 축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인 장로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은 노동의 효과 면에서 아주 능률적이라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피곤한 기운을 주일에 쉬면서 새 힘을 얻어 월요일에 발동하면 회사편으로서는 큰 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일을 보낼 때 불신자 종업원들은 야외에 나가 술 마시고 고성방가하며 종일토록 그 몸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몸은 건강이 말이 아니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회사 일을 망쳐 놓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휴일을 소창이나 레크리에이션이란 말처럼 의미 있게 잘 관리하면 휴식은 진정보다 나은 창조력 소생과 재창조력의 발판 및 동력이 됩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24시간 노력한다고 한결같은 효과나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도 학교에서 공부할 때면 얼마간 수고 뒤엔 반드시 중간에 약간의 휴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휴식이 노력하는 시간보다 더 길면 본말이 전도되어 휴식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휴식은 필요합니다. 불면, 불휴의 노력과 봉사도 중요하지만 일정한 활동 후에는 효과적인 휴식이 필요합니다. 휴식은 휴식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출발과 재창조를 위한 위대한 산실로서의 휴식입니다. 휴식은 보다 나은 능률, 보다 새로운 창조를 약속합니다. 휴식은 무의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레져(Leisure) 시대라고 떠들기 전에 먼저 휴식의 의미를 바로 인식하고 그 의미를 옳게 살립시다. 휴가를 즐기자고 열을 올리기 전에 진정 여가를 선용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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