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광야의 기갈문제 해결 (막 08:1-10)

첨부 1


본문에 나오는 빈 들은 황폐한 광야입니다. 그리고 황폐 현상은 그 시대 상황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단 그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상의 축소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갈 현상을 찾아봅시다.

1. 정의로운 지도자의 기갈 제수와 동거하는 헤롯을 찾아 세례 요한은 직선적으로 헤롯의 비행을 규탄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충고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요한은 투옥되고 요부 헤로디아의 이간질로 목까지 잘리웁니다. 죽어야 할 인간에게로 표창장이 수여되고 살아야 할 인간은 처형이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정의가 말라버리고 불의가 성행하는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벳새다 광야의 군중은 정의에 메말라 탄식입니다. 이처럼 정의에 굶주렸던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의 말라기 이후 오랜만에 혜성 같은 등장에 기대가 컸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로 시작되는 그의 설교는 언제나 과격하기는 하였지마는 책망도 칭찬처럼 좋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덧없이 요한의 목이 잘리우다니…… 지도자를 잃었던 군중은 벳새다 광야로 모여들었습니다. 사실 양떼는 목자를 만나야 길을 찾으며, 민중은 지도자가 있어야 난국을 타개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요한의 등장은 우매한 헤롯과 그의 일가족에 의해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도 정의에 목마른 시대를 후련하게 일깨워 주는 지도자가 5, 6명이 입후보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2. 빵의 기갈 빈들에 모인 사람은 장정만 사천 명이었으니 장정에 끼지 못한 노인과 어린이, 부녀자, 병자들까지 계수하면 만 명에 가까운 군중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들 중에 음식이 불필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빈들이며, 인가도 식당도 보이지 않는 기갈의 광야입니다. 하루에 밥 세 그릇이면 살아가는 인생인데 이것마저 해결이 안 되어 수많은 아사자와 영양실조자가 20세기의 문명 속에서도 지구를 덮고 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얘기입니다.

3. 눈물의 기갈 장소는 빈들, 저녁때쯤 되어 군중들을 돌려보내자고 제자들은 예수께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제안은 현실적이며, 논리적이긴 하지만 눈물이 없습니다. 해 저무는 빈들이기 때문에 굶주린 무리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주님의 마음을 저들은 갖지 못했습니다. 종교란 논리만 가지고는 제 구실을 못합니다. 종교란 나약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석고 제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니라’ 하는 예수의 눈물이 우리에게 없을 때 상대방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방편으로만 이용하려고 하게 되며 이용 가치의 유무로만 사람을 다루게 될 때 거기에는 타산과 이기심이라는 뼈만이 앙상하게 남아 살벌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이 절망적인 정황 속에서 종교인에게서조차 눈물을 찾아 볼 수 없다면 이것은 너무 삭막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4. 신앙의 기갈 “너희가 이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모자라겠다고 항변합니다. 도대체 지금 자기들에게 이백 데나리온의 돈도 없거니와 또 있다 하더라도 그만한 분량의 떡을 사올 수 없고 사온다 해도 이 무리에게 한 개씩 돌아가겠느냐는 말입니다. 계산이 빨라서 좋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판단은 옳지 못했습니다. 예수 자신도 이런 판단쯤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원하신 것은 숫자의 산출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빈손이오나 주께서는 능히 먹일 수 있나이다’ 하는 고백이 듣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대신 제자들은 인간적 계산을 앞세우므로 주님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예수 제자 된 도리로서 껍데기 신앙뿐이었습니다. 신앙 신앙 하고 떠들기는 하지만 사실 신앙 부재의 현실 교회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고갈까지를 탄식해야 합니다. 기갈의 광야 같은 사회에는 정의의 기갈이요, 민중은 지도자의 기갈이요, 영세민은 빵의 기갈이요, 종교인은 사랑의 기갈이요, 교회마저 신앙이 고갈된 것이 오늘의 정황인 것입니다. 이 절망적인 광야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은총이 일어나서 다시 사는 길이 열려야 한다고 입을 가진 사람마다 말합니다. 다시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혁명도, 정권 교체도 아닙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근본적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제도의 혁신이 아니라 인간의 혁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혁신되지 않는 한 혁명이나 정권 교체를 아무리 반복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언제나 피장파장일 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인간이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1) 나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밤, 뒷골목의 외등 전주의 등을 뽑아가려던 좀도둑을 발견하고 양심이 없는 놈이라고 일격을 가한 어느 사나이가 자기는 그 길로 어느 집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서 강도질을 하다가 체포되었다는 이야기처럼 사람들은 대개 남의 비행에 대해서는 의분을 느낄 줄 알지만 자신의 비행에 대해서는 의외로 둔감합니다.

4.19는 자유당 때문이요,

5.16 군사혁명은 민주당 때문이요, 박정희 암살은 공화당 때문이요, 그렇게 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감도 느낄 줄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는 백년하청이라 문제는 그가 아니고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기에 벳새다 광야 속의 한 소년은 제자들의 무능을 비난하지 않았고 기성세대의 봉사를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먼저 자기 자신부터 먹을 것을 예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내 자신부터 바르게 살아 보십시다. 나부터 교통질서를 지키고 내 가게부터 불량상품을 팔지 말고 국가에 해되는 일이면 나부터 솔선수범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혁신은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내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2) 작은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큰 것은 힘이 부족해서 못하고 작은 것은 눈에 차지 않아서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발전이나 향상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큰 것은 힘이 생기어지는 대로 할 작정이고 우선 작은 것부터 새로워져 가야 합니다. 시간 하나를 지키지 못해서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이란 창피한 조롱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고쳐볼 생각은 하지 않고 남북통일만 떠들어 댄다고 해서 애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기에게 있는 보리떡부터 예수께 바친 벳새다 소년처럼 우선 가능한 데서부터 먼저 시작해 보십시다. 그러면 큰 것도 잘 될 수 있습니다.

(3) 그런 일은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후일 어른이 된 다음 돈을 벌어가지고 예수를 위해서 크게 봉사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이 소년이 벳새다에서 그냥 돌아갔다면 그는 영원히 그런 기회를 다시 만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자기의 작은 보리떡이나마 즉시 예수님께 드리었을 때 변화는 열두 제자에게 고요히 번져갔고, 그리고 많은 군중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겨우 일곱 개의 보리떡을 받아들고도 군중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에 순종할 용기를 얻었고 군중은 오십 명씩 백 명씩 모여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릴 만큼 양보의 미덕을 발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포식하고도 남은 것이 일곱 광주리였습니다. 실로 기갈의 광야가 풍성한 식탁으로 변할 수 있었음은 인간이 변하면 물질도 따라서 변하는 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회에 변화의 불씨를 던져 줄 사람이 지금도 절실히 요구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나부터 변화되어 작은 것부터 고쳐나가기를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한다면 이 비극적인 절망의 광야가 소망의 동산으로 변해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소년에게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습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수님 한 분만을 주시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소망의 주요, 사랑과 능력의 주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는 중에 그의 중심에는 자연히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계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러면 나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내가 변화 받으면 사회도 변화할 것입니다. 떠들고 폭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이, 그러나 힘차게 번져나가는 그의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오늘에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고요한 혁명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