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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등산의 영광과 하산의 사명 (막 09: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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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을 셋으로 분류하여 오늘의 설교를 전개시키겠습니다.

1. 현실을 외면한 크리스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사람들을 피하여 혹은 혼자서 혹은 측근의 몇 제자를 데리고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위기에 처하여 드린 세 번의 기도가 있습니다. 최초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다음은 변화산에서, 최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입니다. 이 세 기도는 기도가 세상에서 강행하신 사명의 수행, 곧 그의 생애의 근본 목적에 대한 인식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첫째, 광야에서의 기도는 그가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이 세상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개혁자로서가 아니라 영과 진실에 속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새 생명에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둘째, 변화산의 기도는 그가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길은 그 자신이 세상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는 데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겟세마네의 기도는 위의 원칙에 따라 십자가의 죽음이 실현되려는 단계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 세상의 정치가나 종교가의 길을 선택하였다면 그는 민중에 의하여 왕으로 옹립되어 당대의 영웅으로서 로마제국에 대항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영혼을 죄의 속박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와는 아무러한 관계가 없는 나라의 역사상의 인물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에 예수가 현실의 세상을 떠나 베드로의 말과 같이 산상에 집을 짓고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영광 중에 상주하기 위하여 소위 수도원 생활의 길을 선택하였다면 그는 평안하고 적절한 기도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피 흘림이 없이 죄 사함과 부활의 힘을 사람들에게 허락하시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다같이 본문에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엿새 후에 예수께서 다시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가 기도하고 계시는 중에 제자들이 있는 데서 그의 얼굴 모양은 변하고 옷은 눈이 부시도록 희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함께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이루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와 같은 영적 분위기 중에 쌓여 그 영적 현상을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영적인 이해가 결핍됨으로 예수님을 이 변화산에 머무르시게 하는 것이 그를 추앙하는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여 “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참 좋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십시다”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지상적인 형태로 고정시켜 세계의 모든 문제 해결의 중심을 설치하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의 것으로 고정시켜 십자가를 무시한 어떤 정착적인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는 인간적인 생각에서의 발언으로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책망을 받은 베드로가 또 한 번 불신앙을 폭로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 우리의 이웃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에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하여 한적한 장소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준비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또 한 가지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골방에 앉아 기도와 명상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살을 도피하여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마음의 문을 막고 있다면 이미 진정한 크리스챤이랄 수 없습니다. 고귀한 환상의 경험을 가진 자는 인간의 요구에 응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2. 변론만 일삼는 크리스챤 예수님은 베드로의 청을 들은 체도 안하시고 세 제자와 같이 하산하셨습니다. 산 아래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봅시다. 이 산 아래에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하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아버지가 간질병 아이를 데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이때 많은 군중 속에 있던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의 무능함을 폭로하고 비웃었습니다. 이때 귀신들린 아이는 계속 병적인 증세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산 위와 산 아래의 관계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이것을 비교해 보면 산상의 정숙과 산 밑의 혼란, 산 위의 모세와 엘리야 대신에 산 밑은 당황한 아버지와 간질병의 아들, 산 위의 하늘의 목소리 대신 산 밑의 제자들의 무능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행위에 있어서도 산 위와 산 아래의 대조가 심합니다. 산에서는 기도하시는 중에 얼굴이 변하고 하늘의 손님들과 대화하셨는데 평지에서는 병자의 요구와 제자들의 무능에 대한 실망입니다. 산 위에서는 바로 하나님과 만났는데 이제는 산 밑에서 마귀와 싸웁니다. 위의 모습들은 뚜렷한 대조 아래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두 곳에서 다 예수는 참 메시야이심을 능력으로 보이셨습니다. 위에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아래에서는 그것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하산하신 예수님은 이 혼란 중에 뛰어드시어 변론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그들과 무엇을 변론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돌이켜 볼 때 기독교 역사에는 후대 제자들 간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교회 제도와 특권에 대한 변론만 일삼다가 무수한 농민이 흑사병과 기근으로 죽어 나갈 때 교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변론만 하다가 실로 교회의 실제 사명은 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와 이웃을 외면하고 언제까지나 교회 안에서의 교리와 방법만을 일삼을 때 전도의 길은 막힙니다. 우리는 욥과 그 세 친구와의 변론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무익한 변론은 해결도 주지 못합니다. 변론보다는 먼저 실천을 앞세우면서 사는 크리스챤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실망을 안겨주는 크리스챤 어떻든 제자들의 무능이 먼저 간질병 들린 소년의 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변론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귀신들린 소년의 간질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기도하면 병이 다 나을 것이다. 기도해도 안 나은 병은 믿음이 부족해서이다. 신유은사는 반드시 신앙의 강약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즉 사람의 기도가 강하고 약한 문제도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의 제한도 아니며 하나님의 의사 문제입니다. 병 낫고 안 나음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있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4)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아이 아버지의 신앙을 나무랬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회의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주님, 주께서 다 하실 수 있습니다”(눅 5:12)라고 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병을 안 고치셔도 더 큰 기쁨을 안겨 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식의 병 고침을 받고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자식의 병이 불치라 해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더 위에 계십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주시는 형태를 사람과 장소에 따라 결코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자의 간구에 대하여서 항상 최선의 응답을 허락하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것은 항상 최선임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민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도 그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온 인류를 위해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기는 쉬우나 사랑스럽지 않은 한 죄인을 사랑하기란 심히 어려운 것입니다. 민족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개인을 진실하게 사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실망과 슬픔에 잠긴 교우 하나 하나를 아끼고 사랑하기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마 5 ; 24에 보면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나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내 개인을 위하여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은 없습니까? 어떤 수도사의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뵙고자 기도하던 중 가난한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생각하다 못해 먹을 것을 기다리는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도하던 자리를 떠나 그들을 돌봐주고 돌아오니 예수께서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나는 도망쳤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산상의 변화는 빈민에 대한 활동을 위해 힘을 주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현실을 외면하는 크리스챤이 아닙니까? 우리는 변론만 일삼는 크리스챤이 아닙니까? 우리는 실망을 안겨주는 크리스챤이 아닙니까? 말씀이 행위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배는 생활 속에서 사랑과 봉사의 활동으로 계승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등산의 영광에만 흥분하지 말고 이 은혜를 토대로 하산의 선교적 사명을 다 합시다. 이러한 실천적인 삶이 부름 받은 크리스챤의 하여야 할 본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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