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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가 쓰신다 (막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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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생긴 한 사건에서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되는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한 말씀 중에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우리 심령에 부딪칩니다. 마 5:13의 산상수훈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 이니라”는 말씀과 좋은 대조가 됩니다. 쓰임을 받는 길은 영광된 일이요 버림을 당하는 길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물건이 못쓰게 되어 버린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 아무 쓸 곳이 없어 버림을 받는 것처럼 큰 수치와 고통은 다시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그의 가치나 존재를 인정해 주지 못할 만큼 버림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 시간 쓰시겠다는 말씀에 우리를 쓰시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를 올리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본문은 나귀 새끼 한 마리의 쓰임에 관한 얘기입니다. 베다니와 벳바게란 동리는 감람산 동남편에 있는 두 동리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베다니로 가서 아무도 타지 아니한 나귀 새끼를 예수님을 위해 몰고 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사람이 묻기를 왜 몰고 가느냐 묻거든 그저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그 주인은 주님을 아직 모릅니다. 아직 타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를 주님께 제공한 것입니다. 그 마음, 그 정성은 더욱 향기롭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큰 교훈은 주님의 필요에 한 인간이 응답하고 그 필요에 한 인간이 순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교제나 정분이 두텁고 얕음은 피차에 서로 상대방의 필요에 응하는 일과 응하지 않는 일에 있습니다. 나의 필요를 저 사람이 채워주고 그 사람의 요구를 내가 들어줄 때 서로 간의 교제가 생기고 정분이 두터워가는 것입니다. 이런 교제의 원칙이 주님과 우리 사랑에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시 115편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가 있을지언정 우상과 교제 대상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를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필요와 요구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또한 그 필요와 요구에 응답할 때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경험에서 보면 그가 그리스도에게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다메섹 도상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실상 이런 음성이 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유대교 전통을 깨뜨린 목수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죄수인 나사렛 예수와 그를 열광적으로 따랐던 신도들을 증오하였던 사울은 예수란 이름 자체도 이 땅에서 없애 버리려 했습니다. 이러한 각오 하에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사울아 하시는 주의 음성에 주여 하는 바울의 응답으로부터 바울의 신앙은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을 이렇게 인격적 교제라고 생각할 때 나귀의 주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주님의 필요에 서슴치 않고 응한 것은 그가 얼마나 주님께 대한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가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신앙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와 반대로 요구는 철저하게 이루고자 주님께 매어달리면서 주님의 요구에는 귀를 기울여 보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신앙은 피차에 주고받아야 할 인격적 교제 관계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요구만 철저하게 관철시키려 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비록 지극히 적은 일이라도 겸손을 표방하여 사양하고, 비겁하게도 주저하고, 냉냉하게 거절합니다. 베다니의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자기의 소유권 문제나 다른 문제는 개의치 않고 바로 나귀를 제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자신의 아들을 바침으로 그의 신앙은 위대한 신앙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상태는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시려고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생명까지도 주시려 하시는 예수님에게 자기의 나귀 새끼를 바친 그 베다니 사람의 행동은 위대한 신앙의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나귀는 아직 사람들이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나귀였습니다. 아직 사람들을 태우기는 미숙한 것이라고 하겠으나 지금까지 기른 힘과 지혜를 제일 처음으로 주님을 위해 바친 것은 장한 일이었습니다. 유대 사람의 경건은 그 처음 난 것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종종 자신의 경건을 표시했습니다. 양도 처음 난 것, 곡식도 처음 익은 것, 자식도 맏아들, 이렇게 그 신심과 경건이 포함된 순수한 제물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정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곳에, 다른 일에, 다른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먼저 바치고 쓰고 나머지 정성을 주님께 바친다는 것은 바치지 않은 것보다 나을지 몰라도 그 정성은 처음부터 그 곳에, 그 이에게, 그 시간에 바쳐진 것보다는 순수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들 신앙의 열정이 없는 것은 우리 마음과 정성의 분열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쓰다 남은 시간과 정력을 주님께 바친 것은 분명히 순수한 신앙은 아닙니다. 타산적인 현대인의 지혜가 우리 신도들 마음에도 자리를 잡고 나의 순수한 첫 정성을 주님께 바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베다니에 사는 그 친구는 첫 정성을 주님을 위해 바쳤고, 존귀히 대접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작은 나귀는 주님께 쓰임으로 무한한 영광을 받은 것입니다. 이 나귀는 짐을 나르기 위해 쓰여질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기 위해 지금 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느낌에 남에게 이유 없이 이용당함을 알 때는 불쾌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이용하는 자가 권력가나 부자이면 굴욕보다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간, 물질 들이 주님께 쓰여 진다는 것은 무한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니 많은 사람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열렬히 그 일행을 환영했습니다. 나귀는 혼자 생각합니다. ‘내가 가니 모든 사람이 굽실 굽실 거리며 환영하는구나’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환영을 받은 것은 주님을 모신 영광 때문에 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주님 때는 영광과 대접을 받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의 존귀 때문에 주님을 모신 나도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룩하시는 큰 사업은 결코 세상이 다 아는 큰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아닙니다. 영광을 받은 사물이 베들레헴의 천한 말구유였고,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를 잡던 천민들과 멸시를 받아 온 세리를 높이 드시어 영광스러운 사명을 맡기신 것처럼 주님의 사업은 보잘 것 없는 약한 자와 사물들을 통해 큰 영광을,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행 4:11에 보면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는 말씀 그대로 사람이 쓰지 못할 돌이 하나님의 손에 쓰여질 때는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를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작은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께 바쳤을 때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작은 재능, 기술, 물질, 경험이지만 주가 쓰실 것으로 바칠 수 있는 용의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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