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제 3 종교개혁의 때 (막 11:15-19)

첨부 1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그 교회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고 로마 교회에 도전한 마틴 루터의 행동은 당시의 세계 역사를 새롭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루터는 일개 무영의 신학자였으며, 그 당시 교황에게 도전했던 것은 의식적으로 새로운 교회나 다른 조직을 목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때 수도원의 생활에서 인간의 구원은 자신이 한 공적으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더 나아가 깊은 신앙과 신학에 집념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1510년 마침 로마에 갔을 때 성 과테란 교회에 있는 스칼라 산타의 유명한 층계에서 무릎을 꿇고 올라가면서 죄를 참회하고 있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층계는 예수 당시에 빌라도의 법정이 있었던 곳으로, 이 층계를 무릎으로 올라가면서 죄를 고백하면 사죄함을 받는다고 전해왔습니다. 루터는 그 층계를 무릎으로 올라가던 중 바울의 말씀이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17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에 감동을 받고 인간의 구원이 공적에 있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일어나서 나머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고 합니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재발견에 있었고 교회 자체의 부정이나 새로운 교회의 시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초기에는 신학적인 구속의 문제와 성서적인 구원의 진리를 중심으로 도전했었는데 그것이 나가서는 교회 제도 자체와 법왕의 절대 무오설에까지 도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루터교는 오늘날도 그 신학적인 면에서는 루터의 신학적인 면을 따라 구교와 입장을 달리하나 의식면에서는 구교의 의식을 답습한 것이 적지 않습니다. AD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교회의 자유령’에 의해 기독교의 박해는 끝나고 기독교는 로마의 종교 국교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되기 전 박해 때에는 기독교인들은 참 신앙으로 살았으나 국가 교회를 공인하여 국교화 했을 때는 교회는 필요 이상의 권위와 자유를 남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차 제도화되어가기 시작했고 조직이 강화되어졌습니다. 이는 교회가 비대해지고 정치면에까지 야합하여 그 본래적 사명인 신도들의 영적인 면을 지도하고 그 삶을 충실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의 확장과 유지를 위해서만 더 힘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의식과 형식화 되어 아무런 감화를 주지 못했고 권력을 이용한 교회는 행패와 부정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계급화, 특권화 되었고 더 많은 권력과 재력을 얻기 위하여, 죄 사함을 위해서 면죄부까지 팔기에 이르렀습니다. 죄의 고백에도 돈, 임종식에도 돈이요, 돈이 없으면 종도 울리지 않고, 돈 없으면 교회에서 결혼식도 장례식도 할 수 없었고, 돈 없는 자는 하늘 문도 닫혀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전하여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독일 색소니 지방의 한 교회에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초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앞에 많은 재물을 바치면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가 방긋 미소를 지어 웃고, 적게 바치면 외면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정성들여 그 앞에 재물을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그 곳을 살펴본 결과 그 초상에서 떨어진 곳에 그 초상과 연결된 줄이 있어서 그 줄로 그 웃음을 조정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극단의 부패와 부정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그릇된 신학의 사조를 이루게 했으며 법왕의 권위를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더 강조한 결과에까지 이끌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교황은 지옥에 간 자라도 돈만 바치면 천당으로 옮길 수 있는 권력까지 과시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패에 도전한 루터를 위시한 지극히 적은 자들의 주장과 항거는 분명히 새 시대를 향하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역사의 도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얼마나 자신들에게 큰 힘이 되었는가를 실증해 주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여러 선지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적은 무리들이었으나 항상 새 역사의 비전(Vision)을 갖고 낡은 세대나 권력에 도전한 것입니다. 루터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하나의 신학의 문제, 신앙의 문제인 동시에 그것이 교회 자체와 그 당시 교회 본질의 문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나아가서는 체제안주를 위한 교회 자체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습니다. 루터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새로운 인간과 새 역사를 찾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사는 길을 성서를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성전 숙청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 성전은 하나님이임재하는 곳이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그 집이 도적의 소굴로 되어 예수께서는 크게 노하셨습니다. 당시는 유월절이 임박하여 세계 도처에서 유대인들이 성전에 예배하러 모여들었습니다. 성전 뜰에서 돈 바꾸는 시장과 같은 모습을 이루었습니다. 그곳은 곧 시장이요, 돈 바꾸는 거래소가 되었으며 이미 성전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탈바꿈된 성전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을 향해 채찍을 드셨습니다. 그 무리들은 주의 전에서 아무 필요 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채찍을 드신 예수의 결단은 늦은 감은 있으나 언젠가는 있어야 할 일을 하신 것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그 성전을 출입하시면서 그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개혁할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아마도 그 때를 참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인간이고, 믿는 무리이고, 또 지도자들이기에 시간을 두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침내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예수는 이에 도전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도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고 무릇 만물은 시간이 흐르면 낡아지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새로워지고자 힘쓰지 아니하면 부패하고 되고, 타락하게 되고 맙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메시야를 기다리던 유대교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태해지고 부정을 일삼고 이기심에 끌려오실 메시야를 말로만 기다리고 가르쳤지 저들 마음에는 호리만큼의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부패와 타락과 불신에서 썩어졌던 교회 속에 갇힌 하나님의 권위를 회복했습니다. 그로부터 450여년이 지난 오늘의 개혁 교회는 그 개혁 정신을 기초로 교회를 형성했으나 실제 그 정신은 유물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개혁교회란 부단히 개혁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오늘도 교회에서는 분쟁과 파쟁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결코 그의 종교개혁으로 자신의 명예를 남기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혁교회는 사실상 중세기 카톨릭을 답습하고 우리 하나님의 산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제도나 조직을 더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또 인간 윤리의 문제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개혁교회는 중세 교회 못지않게 교회의 확장과 기구 확장에 관심을 갖고 그 교회 자체에만 온갖 자본을 쏟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교회주의’에 빠지고 있습니다. 개혁교회의 간판만 있지 개혁하려는 노력과 정신은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무 비전(Vision)도 없고 교회의 사명도 애매해져 가는 실정입니다. 무엇을 위한 예배인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을 위해, 이웃을 위해 존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 교회 자체만을 위해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 예수 당시와 같이 돈 바꾸는 일과 비둘기 파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이용하여 출세하려는 무리들이 없지 않으며, 오늘의 교회는 충성된 교인을 죄인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해관계와 지역감정에 매여 있는 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니며, 교회는 세상의 거침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진정 새로와져 가고 있습니까? 먼저 교회는 신학의 빈곤으로 개혁이 중단되어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교회는 주의 성령이 떠난 교회이며, 주의 영이 없는 교회는 또 하나의 인간 집단으로 밖에 구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이 당시 부패된 교회에 대한 주의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다면 그 때부터 사백 년이 지난 오늘의 개혁 교회는 무엇인가 새로워져야 할 현실에 직면했으나 이 교회가 새로워지고 변혁되지 아니하면 송장이 되고 말 것이며, 저 애굽의 피라밋과 같이 굳어지고 말 것입니다. 제 3의 종교개혁을 이루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오신다면 이 교회는 주가 보시기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장사꾼의 터와 같은 교회로 보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참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였거니와 믿음 없는 현대 교회는 진통을 겪는 한이 있어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워지는 교회는 말로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연구하는 교회이며, 성도들이 말씀과 신앙으로, 진정으로 새로워져 가야 바로 교회는 개혁을 행하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숨 막히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교회 개혁의 일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