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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내니이까? (막 1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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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시는 식탁에서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자기 주님을 은 삼십 냥을 받고 팔아 버렸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참으로 좋은 이름입니다. ‘유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찬양’이란 뜻입니다. 유다의 이름을 가진 자 중 유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약성서 중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이며,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유대의 애국자 ‘마카비’가 ‘유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 때문에 흔히 유다라는 이름은 악을 상징하는 대명사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이후로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서양에는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원래 처음부터 그 마음이 어떠한 가증되고 악한 것으로서 차 있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가룟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정직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하였다고 봅니다. 물론 유다라는 사람이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역시 다른 열 한 제자도 완전무결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도 자만심이 많았고, 또 비겁하기도 하였습니다. 도마를 보면 침울하고 우울하여 의심을 잘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이기적이고 무엇이든지 자기 본의였고, 또 너무나 야심에 넘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의 명예와 지위만을 찾고 있었으며 그 명예를 위해 서로 논쟁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불완전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로서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완전한 사람들에게서 좋고 아름다운 면을 보시었으며, 또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만이 가룟 유다를 신뢰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열 한 제자들도 이 유다를 신뢰했습니다. 회계의 직분을 맡겨 그의 장점을 다 믿었습니다. 또한 가룟 유다는 자기 직분에 등한히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가룟 유다에게는 좋은 특색과 장점이 있었다고 봅니다. 또 중요한 사실은 가룟 유다 자신이 예수를 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도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신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한 것입니다. 세상만사를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설교도 들었고 기적도 보았고 예수님이 하시는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실족하여 배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주의 제자요, 부름 받은 자였지만 반역하여 씻을 수 없는 오명의 주인공이 되고 만 것입니다.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 사실에 너무도 놀라움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서로 자기 약점을 살피며 자기 자신이 아닌지 위험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도 내 스스로 옳은 체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약점을 생각하여 “주여 내니이까” 하고 시종 울어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메시야심이 나타나지 않고 천천히 진행하기에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 오히려 메시야의 역할을 다하여 예수께서 왕으로서 통치하길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은근히 발표했을 때 다른 제자들과 같이 유다도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한 그 참 뜻과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라고 함은 고난을 말했고 제자들 생각에는 통치와 지배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점차로 제자들은 메시야는 고난의 종을 포함하는 뜻으로 예수를 이해하게 됐지만 가룟 유다는 못마땅했고 자기의 목적이 달랐다는데 너무 실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점점 인내심을 잃고 성급해진 것입니다. 그가 참을성 없고 매우 성급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예수를 판 후 좀 기다려 그가 무엇을 하실지 보기도 전에 급하게 자기 생명까지 스스로 끊어 버림을 보아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기다릴 수 없어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고 움직여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해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주님 예수께 이와 같이 성급하게 굴었습니다. 한편 단순한 열 한 제자들의 순박한 마음같이 우리도 ‘주여! 내니이까?’ 하고 질문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주님을 판 것이 내니이까?”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이 나 때문입니까?” “주님의 제자라지만 은혜 받지 못함이 나 때문입니까?” 우리는 인내심으로 내 가정에게, 내 자신에게 너무 성급하게 대하지 말고 인내로 자신을 억제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오래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을 부여받기 위해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가룟 유다는 또 돈을 사랑했습니다. 돈이란 것은 좋은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돈을 얻고 천하를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또 한 가지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로는 아마 자기만 빼돌림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젖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외당하는 일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맨 처음 주님을 따를 때부터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예루살렘 출신이고 가룟 출신은 오직 가룟 유다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남방 도시 가룟 출신이었으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가족, 집, 친구 등을 다 버리고 북쪽 갈릴리에 와서 열두 제자 중 한 사람 속에 가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의 수제자 자리를 지킴에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열등감이 점점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비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제자보다 회계의 직책으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다른 제자와 비교해 볼 때 그들은 자기보다 더 많은 총애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고립되고 소외될 때마다 미친 듯이 예수도 팔고 제자들의 의리도 지키기 싫고 세상만사가 다 파괴됨을 원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질문에 “주여 내니이까? 내가 주를 팔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만일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지 아니했더라면 베드로의 성격을 볼 때 예수를 가룟 유다 대신 파는 실수를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하필 가룟 유다의 죄만 용서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베드로의 죄나 가룟 유다의 죄에 있어서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았고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주 앞에 회개했고, 가룟 유다는 주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의 회개를 위함이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고 내가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다면 이 모든 고생과 고난이 과연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라고 대답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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