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가 이 돌을 굴려 주리요 (막 16:1-4)

첨부 1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던 몇 사람의 여인들의 이름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다음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여인들은 목메어 울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다니 하늘도 무심하지. 오천 명을 먹이시던 주님께서 돌아가시다니. 그렇게 훌륭한 분이 강도들과 함께 가시다니. 병자를 고치시고 천대받고 멸시받는 세리들과 창녀와 죄인들을 새 사람으로 만드시며 실망한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죽은 자에게 다시 생명을 주신 분이 돌아가시다니” 하며 분함을 참지 못하여 목 메인 소리로 서로 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 여인은 자기들이 사랑하고 사모하고 존경해 온 주님이 돌무덤 속에 시체로 썩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가신 주님의 시체라도 만져보고 그 시체에 기름이라도 바르고 싶어서 그 무덤을 향하여 새벽 일찍이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무덤 앞에 왔을 때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또 하나 새로운 근심에 사로 잡혔습니다. “누가 저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굴려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돌은 너무 컸고 그들의 힘은 너무도 약했기 때문에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돌을 옮겨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저 돌을 옮겨놓아 줄 것인가”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느 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의 시체만이라도 만질 수 있기를 더욱 애타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대한 애타는 사모심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정성을 알아주셨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속담 그대로였습니다. 그 지극한 정성은 마침내 하나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다시 무덤을 보았을 때 그 무겁고 큰 돌은 보기 좋게 스스로 굴러 가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고자 한 그들의 소원은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저 돌을 옮겨 줄 것인가?”라는 말은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무덤을 찾았던 사람의 비명만은 아닙니다. 오늘 이 한국이란 비극적인 땅에 살고 있는 우리 한국 사람에게도 같은 비명이 나옵니다. “누가 이 수난의 역사에서 우리의 번영과 행복으로 통하는 길을 막고 있는 저 큰 돌을 옮겨 놓아 주겠습니까?” 이십년 전에 해방이 왔을 때 우리도 이스라엘의 어느 시인과 같이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꿈꾸는 것 같나이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6.25전쟁으로 말미암은 폐허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 후 무너진 우리들의 집터를 소제하고 새 집을 지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헌법과 정책을 바꿔보고 순진한 학생들의 피도 뿌려지고 혁명도 해 보고 데모도 해 보고 가난한 후진국이 경험해야 할 모든 고질과 아픔을 다 치루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들 앞에서 우리의 힘으로 옮겨 놓을 수 없는 무거운 돌문이 행복과 번영으로 통하는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저 돌을 옮겨 놓을 수 있습니까? 예수의 무덤을 막는 그들은 어떻게 생겨진 것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란 전통적인 종교인이 만든 돌입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과 낡은 전통에 사로잡혀 새 술이 새 가죽부대에 담겨지는 것을 핍박한 자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율법 때문에 안식일에 죽어가는 인간에 대해서도 냉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시기하고 질투한 종교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그 무덤 앞에 돌로 막았던 것입니다. 그 돌은 또한 정권자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자기의 손까지 씻으면서 유대의 민중의 비위를 맞추어 정치적 이득을 보고자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넘겨주었습니다. 진리보다 정권욕이 앞서고 양심보다도 이권을 앞세웠습니다. 가이사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하여 진리와 자유를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진리 앞에서 귀를 막고 말았습니다. 옳은 것임을 알면서도 진리를 회피하고 양심의 소리를 억눌러 버린 빌라도의 불법이 예수의 무덤을 가로막는 돌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돌은 종교인과 정치인들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정의와 불의를 알면서도 군중심리에 휩쓸려 진리에 눈이 먼 군중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웃옷을 깔며 환영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저주의 발악을 하였던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민중에 의하여, 민중을 위하여, 민중의 라고 할 만큼 민중이 소중하지만 돈 몇 푼에, 막걸이 한 잔에 선거권을 팔아버리는 민중의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의 장미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로운 자를 죽이는 것은 이런 믿을 수 없는 민중 때문입니다. 예수님 무덤 앞에 큰 돌은 바로 이러한 민중이 만든 것입니다. 오늘 한국을 번영과 행복으로 인도하는 문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이 바로 이런 전통에 사로잡힌 종교인, 정권욕에 사로잡힌 정치인, 이권에 사로잡힌 눈먼 민중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큰 돌을 옮겨놓아 주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의 행복과 번영의 길을 막고 있는 이 모든 돌들을 당신이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보내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