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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적의 시대는 지나갔는가 (막 1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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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저는 많은 분들로부터 이적의 시대가 지났느냐는 질문을 받아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사도들의 시대나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귀머거리가 듣고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귀신들이 쫓겨나는 이적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혹자는 이적 혹은 표적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가르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이적 혹은 표적의 시대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편을 택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관을 정립하는 것일까요? 사실상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관한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 16:17에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은 여기에 답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깡그리 부인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적의 시대가 계속되느냐, 아니면 지나갔느냐가 아니라 이적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과연 이적의 핵심, 이적의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믿기로는 이적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대인만큼 이적 혹은 표적을 찾고 구하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마 16:1-4를 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써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청한 것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고기 뱃속에 삼일 동안 갇혀 있다가 하나님의 역사로 다시 살아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 후에 무덤에 장사된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의 최대의 이적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되신 진리, 즉 성육신(In car nation)의 진리가 있고 사람이 신의 영광에 도달하는 부활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적의 본질은 부활이라고 가르쳤으니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적의 본질은 부활이라고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되는 부활 문제가 단순하게 이적으로만 관련되어 설명하기에는 너무 졸렬한 느낌이 듭니다. 이적의 본질을 물으시는 분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 교계가 갖고 있는 이적에 대한 잘못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적을 신앙의 본질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즘 교계의 신문이나 벽에 붙은 부흥회 포스터를 보면 마치 축복이나 병 고침이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과장되게 광고하고 있는 사례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안수나 안찰, 금식기도나 철야기도가 이적과 기사의 본질이요 물질 축복의 본질이 되는 것처럼 광고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안수나 안찰, 금식기도나 철야기도가 이적과 기사의 수단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이러한 수단 등을 실제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이적과 기사의 본질이 되는 부활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안수나 안찰이나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를 하신 것은 아닙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향하여 부활신앙을 강조하셨습니다. 요 11:26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확인했습니다. 결국 이적의 본질이 되는 부활신앙을 강조하시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부활의 능력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부활신앙을 근거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 역시 복음의 주제는 부활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바울의 설교, 아볼로의 설교, 디모데의 설교를 보아도 모든 사도들의 설교 주제가 부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흥회 광고도 부활을 주제로 한 광고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부활을 연중행사나 절기로만 기념하는 데에 그치지 말고 빛과 생명, 치료와 축복, 이적과 기사의 본질이 된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부활신앙을 강조하여 엄청난 이적과 기사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부활의 신앙을 믿고 강조하여 건전한 이적과 기사를 행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2. 부활신앙을 강조하면서 이적을 부정하는 눈들이 있습니다. 롬 4:25에 “예수는 무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소유한 믿음의 의요 기초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부활은 우리들의 소망의 기초가 되는 것을 밝힙니다. 그뿐 아니라 부활신앙으로 성도들에게 따라오는 표적이 있다는 사실도 성경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기록된 대로 부활신앙을 확신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따라오는 이적과 기사를 인정하고 환영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축복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적의 은총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으로 혈액 불생증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기도로 구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확신을 가질 때 그때부터 그 병은 깨끗이 고침을 받았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이토록 놀랍고도 엄청난 결과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이적과 기사가 있다 없다 말하기 전에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나의 부활이라고 확신하고 고백한다면 내세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도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적과 기사가 따르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요 예수님의 생명은 바로 나의 생명이라고 고백하신다면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시는 구원의 축복은 물론이요 믿는 자에게 따르는 이적도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신앙을 확신하는 대로 따르는 표적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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