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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눅 07: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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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이 세대를 가르켜서 사업은 알지만 인생은 모르며, 기술은 알지만 인간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사업은 누가하며, 기술은 누가 가지며 일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 자체는 모르면서 사람이 하는 사업과 기술은 잘 아는 세대라는 표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대는 모순을 이루고 있는 세대입니다. 모순된 인간, 모순된 법, 모순된 인정, 모순된 사회 모두가 모순투성입니다. 옛날 어떤 시장터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번화된 장터 한 구석에 창(矛)과 방패 (盾)를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창을 들고 장사꾼에게 물었습니다. “이 창이 얼마나 뚫을 수 있습니까?”하자 그때 그 장사꾼이 말하기를 “예, 그 창은 어떤 강한 방패라도 능히 뚫을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손님은 “그러면 이 방패는 얼마나 튼튼합니까?”하고 방패를 하나 들고 물었습니다. 장사꾼은 이번에도 자신있게 “예, 그 방패는 아무리 날카로운 창이라도 막을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창 모(矛), 방패(盾)을 합하여 모순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말의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을 모순이라고 일컬어졌다고 합니다. 세상에 되어가는 일들이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이루고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무감각, 무정한 세상이 현실입니다. 세상의 소설, 영화를 통해서는 울고 웃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무감각한 세대가 오늘날의 세대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위기의 시대를 맞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다」.이 말은 “너는 너요 나는 나다”, “너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네가 피리를 불어도 내가 무슨 상관이냐?” 와 같은 말입니다. “네가 애곡하면 했지 내가 무슨 상관이냐?”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또 이 세대를 눅 11:29에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으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비정상적인 것을 찾고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까?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알고, 저만 잘났다고 하고 남을 존경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남을 아낄 줄 모르고, 남은 다 죽더라도 저만은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대에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시대에 비위를 맞추어 가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알던 모르던간에 모순된 세상, 즉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세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악하고 표적을 구하는 세대, 모순과 시비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면 세대에 휩쓸릴 리도 없고 말려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모순된 신앙, 위기의 세상을 뚫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먼저 갈길이 무엇인지 찾아보며 생애를 다시 더듬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모순된 세상에서 진실된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실한 삶,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애타게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이 벅차고 냉혹하고, 삶이 가혹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바울과 같은 위인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울부짖지 않았습니까? 정말 이 세상을 가리켜서 “고해”라고 표현한 것은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 중에서 진실된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면 과연 진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첫째는 해방 몇해 전 여름 경부선 완행열차 속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땀 냄새를 풍기는 중국 사람에게 안긴 젖먹이 아이가 잠이 깨어 울었습니다. 이 아이의 울음소리로 기차 안은 소란하여졌습니다. 주위에 있던 일본 사람, 한국 사람들의 신사 숙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모두 못마땅한 표정으로 있었습니다. 어느 일본 사람은 고함을 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중국 사람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멸시가 대단하던 때였습니다. 그 아이는 더 큰 목청으로 울어댔습니다. 중국 사람은 미안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아기를 업었다가 안았다가,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하며 안절부절 몸 둘곳을 모르고 몹시 당황하고 초조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계속해 습니다. 그때 한 점잖은 손님이 “여보시오, 그 아이의 엄마는 어디 갔소? 배가고픈 모양이군요?” 하고 물었습니다. 중국 사람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산에서 살고 있는데 그 차이 엄마는 일주일 전에 죽었어요. 그래서 우리 고향인 산동성 부모님에게 데려다주러 가는 길입니다” 하며 그는 후유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우유병을 흔들어 먹여도 아이는 빨지 않고, 과일을 먹이려고 해도 그것을 먹지 않고 그저 보채며 울기만 했습니다. 이때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한 여인이 아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30세쯤 되는, 삼베 적삼과 치마를 깨끗하게 입은 몹시 수줍은 시골티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이를 자기에게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은 돌연히 나타난 여인의 말에 당황하여 어리둥절하고 있으니까 이 여인은 마치 자기 아이를 빼앗듯이 받아 안더니 자기의 탐스러운 젖을 꺼내어 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꿀꺽꿀꺽 맛있게 빨아 먹었습니다. 한쪽을 다 먹이고 다른 한쪽 젖을 다 빨아 먹였습니다. 중국 사람은 희색이 만연하여 방울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몇 번이나 고맙다고 절을 하였습니다. 시끄럽다고 소리치던 사람들은 고요해지는 동시에 손님들의 시선은 그 이름 모를 여인에게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무엇인가 소근거렸습니다. 아이는 양쪽 젖을 맛있게 빨아 먹고 잠들었습니다. 중국 사람은 “고향에 가서 편지를 쓰겠으니 아주머니의 주소와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으나 “그럴 필요없습니다” 하고 웃음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은 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아이는 마치 천사와도 같이 고이 잠들었고 그 아버지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연합군이 공산군에게 내어주고 후퇴 일로에 있었던

6.25 전쟁시 한강 건너 어떤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적군의 도하 저지 최종 작전이 전개되는 포성 속에 오막살이 집에서 어린아이들의 보채는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호기심에 후퇴하던 한 흑인 군인이 이 집의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가 보니 이미 숨져 누워있는 엄마의 젖을 빠는 아이와 그의 형인 듯한 큰 아이가 배고파 우는 것이었습니다. 측은한 마음이든 흑인은 주머니 속에서 초콜렛 하나를 던져 주었습니다. 이것을 재빨리 집어든 큰 아이는 배가 고파서 자기 입에 한 줌 집어 넣고 다 먹으려는 찰나 숨진 어머니를 바라보더니 남은 초콜렛 조각을 엄마의 입을 벌려 넣어주며 “엄마, 이것 먹어”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당시 미국 신문잡지에 실려져서 한국의 비참한 광경이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모든 세계 사람은 울었다고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맺는 말로써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상태는 무정, 무감각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산 것 같으나 죽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탁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원하시고 애쓰시고 계십니다. 세상은 비록 험악하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의지하시는 우리들이 다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다 받으시는 축복된 성도가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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