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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착한 사마리아 사람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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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섯 부류의 사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 속에는 다섯 부류의 인간 생활이 그림과 같이 나타납니다. ① 불한당의 생활 ② 강도 만난 자의 생활 ③ 제사장 및 레위인의 생활 ④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생활 ⑤ 주막집 주인의 생활입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내용들을 영적으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아담 예루살렘-하늘나라 여리고-세상 강도-사탄과 마귀 제사장-율법의 대표자 레위인-예언자들 착한 사마리아 사람-그리스도 주막-교회 두 데나리온-성부와 성령 다시 오겠다는 약속-주님 재림

(1) 불한당의 불의한 생활 문자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월이 험악한 세월이요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이 매우 험악한 길입니다. 칼을 들고 고갯길에 숨어서 사람의 생명을 노리고 재산을 빼앗는 강도, 불한당, 폭리배, 악행자가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호시탐탐 인간의 영혼을 멸망 속으로 빠뜨리려고 노리는 불한당 같은 사탄이 있습니다. 이 사탄은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을 해치는 불한당입니다.

(2) 불한당을 만난 가련한 자의 생활 이 사람은 험악한 무리를 만나서 이렇게 불행하게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인생 행로에는 쓰러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강도를 만나서 쓰러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재난을 만난 사람, 병을 만난 사람, 친구에게 배신당한 사람, 이런 강도 만난 사람들은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원래 여리고 길로 내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강도를 만나 매를 너무 많이 맞고 너무 상해서 자기 혼자는 도저히 희생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는 60리밖에 되지 않지만 60리 길이 15도 각도로 기울어진 언덕길이고, 그 중간에 40여 개의 언덕이 있어 그 길은 산적의 길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과연 험악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항로도 험악한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고해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걷다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희생할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3) 제사장과 레위인, 종교인의 생활 이 길에는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은 그냥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민 19:11에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율법을 거스리지 않기 위함이었을런지도 모르고 또는 예루살렘에서 보름이나 제사의식을 드리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 너무 바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은 도적이 많은 곳이므로 머뭇머뭇하다가 저도 강도를 당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냥 지나쳤는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에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레위지파는 언제나 그들의 모토가 있습니다. “안전제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도 잡음없이 아무 어려움 없이 제사드리는 것을 제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은 길에서 이야기하는 법도 없고 그저 자기 길만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자기 생명의 안전을 위해 빨리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동포의 어려움을 보고는 일신의 안전 때문에 지나쳐 버리는 무자비하고 형식주의자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종교가는 유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한국에도 있습니다.

(4)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생활 이 사람은 주는 사람이요 이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요 도적의 위험도, 자기 사업의 손실과 개인의 위험을 개의치 아니하고 이웃의 도움이 필요한 사정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자기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탔던 나귀에 그 사람을 태워가지고 여관까지 와서 하룻밤을 같이 유하면서 그 사람을 도와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갈 길이 바빠서, 다음날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떠나면서 주막집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계속하여 그 사람을 치료해 주기를 부탁드리며 만일 치료비가 부족하면 돌아올 때 다시 갚겠다고 약속하며 떠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이방사람과 혼열이 된 개와 같은 사람이라고 천대하던 사람들입니다. 강도만난 자는 유대인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원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런 유감의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그 누구나 도움을 받기 원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도와주어서 이웃이 되어준 것입니다. 국경을 초월해서, 종족을 초월해서, 사상을 초월해서 나의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다 내 이웃이라고 여겨 이웃을 내 몸처럼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5) 주막집 주인의 생활 여관 주인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삯을 받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최고의 사랑은 못된다하더라도 역시 귀한 생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을 예수의 사랑에 비하면 주막집 주인의 사랑은 교회 교인들의 사랑이라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신앙은 돈받고 봉사하는 주막집 주인과 같이 상호 교통의 봉사가 또한 필요한 것입니다. 이상 다섯 종류의 사람의 생활 중 우리는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2. 3헌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3헌이라 함은 헌심, 헌신, 헌물을 말함입니다. 33절에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라고 하였으니 이렇게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헌심」이라고 합니다. 34절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게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라 하였습니다. 몸으로 돌봐주고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주는 봉사는「헌신」입니다. 35절에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 하였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옷깃으로 상처를 싸매주고, 그리고 자기의 짐승에 태우고 주막집 주인에게 치료비를 지불하고 그후 부비(浮費)까지 부담하였으니 이 땅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요 자기 소유물을 드리는「헌물」의 사랑입니다. 이 삼헌의 완전한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입니다. 브라운은 말하기를 사람의 생활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나니 네것을 내것이라 하는 사람, 내것을 내것이라 하는 사람, 내것을 우리것이라 하는 사람, 이렇게 세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본문의 불한당은 네것을 내것이라 하는 사람이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내것을 내것이라 하는 사람이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내것을 우리 것이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헌심, 헌신, 헌물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당연 이상의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3헌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변화시킵니다. 혈통을 초월합니다. 민족을 초월합니다. 국경을 초월합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지 도와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가 원수처럼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은 순수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게 계속 멸시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평소 자기를 구박했던 유대인을 사랑해서 구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마 5:43-45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3. 사랑으로 얻은 세 가지

(1) 사랑으로 얻은 것도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 사람의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재물을 얻는 것보다 낫고 명예를 얻는 것보다 났습니다. 이 사람의 생명은 사랑의 힘 외에는 감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2) 둘째, 이웃을 내 사람으로 얻는 것이니 이 또한 값진 결과입니다. 사랑은 원수가 이웃이 되게하는 것이요, 시기는 이웃을 원수되게 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웃이 없다면 아무 생활도 할 수 없고, 이웃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여 주님의 형제를 많이 얻게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이 어디 있겠습니까?

(3) 셋째, 영생입니다. 25절에 율법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이를 행하면 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주님께서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이웃에는 사선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가련한 강도만난 자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책망하면서 지나가고, 석가는 동정하면서 지나갑니다. 율법은 심판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머무르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여러분은 주님의 사랑으로 인명을 구원하고 이웃을 구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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