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의 양식 (요 04:27-42)

첨부 1


예수의 일행은 사마리아 수가성 밖 어구 우물가에서 곤한 행로를 멈추고 쉬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수가성에 갔고 그리스도는 홀로 이 우물가에서 쉬고 계셨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이 우물물을 길러오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가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는 요청으로부터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27절 본문 말씀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라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 인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 유는 유대 풍속에 길에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랍비 격언에 “아무도 길에서는 여자와 말하지 말며 자기 아내와도 말하지 말찌니라”고 하여 랍비들은 여자를 멸시했고 여자들에게는 율법의 교훈도 가르칠 수 없는 자들이라고 천시하였습니다. 유대인이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금물이라는 유대 풍속을 예수님께서 모를리 없으련만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준비한 먹을 양식이 나의 참 양식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기를 바랍니다.

1. 나의 양식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2절, 34절). 이 말씀은 방금 성취된 사마리아 여인의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주님의 양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요 5:30 말씀의 “나는 나의 원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또 요 6:38 말씀의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최고 목표이었고 삶의 양식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사마리아 여자를 구원시키는데 몰두하여 먹는 것을 잊어버리신 것입니다. 마 4:4의 말씀처럼 실로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의해 사는 것이라는 실증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하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양식이었습니다. 34절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어쩔 수 없이 하는 노동이 아니었고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전도가 기쁨이요 양식이었습니다. 바울이 고전 9:16에 말한대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세상에 아마 최대의 천직은 전도의 사명, 그것일 것입니다. 전도를 하는 이도, 받는 이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즐거운 일이 곧 전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일, 죄의 사유의 복음을 전하는 일, 천국 건설, 영생 부여의 약속을 전하는 일은 즐겁고 기쁜 일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인 것입니다. 전도는 그러므로 쾌락이며, 환희이며, 만족이며, 휴양이며, 건전한 양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는 남의 동정을 받을 직업이 아니요 부러워함을 받을 만한 직업입니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보다도, 대 회사의 사장이 된다는 것 보다도, 대 지주가 된다는 것보다도 훨씬 높고 훨씬 귀하고 훨씬 즐거운 직업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전도직을 구하는 자가 적습니다. 내가 분명히 한 가지 확신한 것은 만약 세상에 완전한 행복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식은 택함받지 못한 자는 알 수 없는 음식이며, 택함받은 자는 이 양식 없이, 이 생명 없이, 자양 풍족한 하나님의 양식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전도를 음식물로 하신 것이며, 생명을 십자가에 버려도 복음 전도는 그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정열과 목표는 다음으로 요약됩니다.

(1) 하나님의 뜻과 일을 온전히 이룬 데 있었으며(요 4:34)

(2)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데 있었고(요 8:29)

(3)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었으며(요 8:50)

(4)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데 있었으며(요 15:10)

(5)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케 하는데 있었으며(요 8 49)

(6)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었으며(요 12:49-50) (7) 아버지를 나타내는데 있었으며(요 14:9) (8)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요 4:9)이 그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하시는 것을 자기의 의무요, 또 기쁨으로만 하지 아니하시고 이것을 자기의 먹고 마실 양식처럼 하시었습니다. 구약 성자의 한 사람인 욥은 욥 23:12의 말씀에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의 으뜸이신 그리스도는 욥보다도 한 발자국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업하는 것이 자기의 양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업에는 열심이지만 하나님의 사업인 구원사업엔 게으른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실을 돌파하고 꿋꿋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무엇이라 비방해도 상관말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밟아갈 것입니다.

2.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육신의 양식에만 도취되었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양식에 대해 잘 알 수 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라리아 여인을 전도하는 것이 바로 양식인 것으로 나의 양식이 있다고 할 때에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서로 의논하였다고 33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과 예수와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곧 오늘의 본 문 중에 눈을 들어 밭을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무엇엔가 도취되면 그 이외의 것에는 관심이 잘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와의 생각이 상이할 때 예수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명령하시며 주위를 환기시킨 것입니다. 유대 나라의 파종기는 12월-1월이며, 추수기는 4월 중순-5월 말입니다. 본문 35절의 말씀에서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하신 말씀은 12월 중순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는 보리는 10월 중순에 파종하여 심습니다. 그러므로 12월 중순, 이 때는 온 들에 보리가 푸르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 보리밭 사이로는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에 의해 수가성민들이 예수님에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 발을 보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제자들은 밭에 있는 보리를 보았고 주님 앞에 모여오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 제자들은 육적 견해를 가지고 주님은 영적 견해를 가졌던 차이가 있었습니다. 영의 추수꾼들인 제자들이 영의 것에 무관심하였고 먹는 문제에만 집착되었던 것은 분명히 저들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나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주님의 환기시키는 경고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해졌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시 인식시키시는 경고의 말씀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36절에 말씀했습니다. 웨스트콧의 경우는 뿌리는 자는 구약의 선지자로, 거두는 자는 주님으로 보지만 풀루머는 구약이란 밭에 주님이 뿌리신 것을 제자들과 모든 주의 종들이 거두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파종기는 어려운 시기이며, 추수기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시 126:5-6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시편 기자는 유대인의 파종과 추수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심는대로 거두는 것이라는 법칙들이 이 파종과 추수에 관련된 구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잠 22:8의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이나, 호 8:7의 “바람을 심는 자는 광풍을 거둘 것이며”이나, 호 10:12의 “의를 심는 자는 긍휼을 거두고”이나, 갈 6:8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으로 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로다”고 한 것은 모두 그런 뜻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썩고 변칙투성이가 된다고 할지라도 태양이 붉게 타 는 한 내일도 동쪽에서 해는 뜰 것이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는 마땅히 그 의의 씨를 뿌려야 할 것은 진리입니다. 38절 말씀이 “너희는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두고 다른 사람들은 노력 하였고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누구겠습니까? 구구한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라고 지적했으며, 또 어떤 이는 예수와 세례 요한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모든 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여튼 사도 이전의 구속사에 대한 노력들을 말합니다. 때는 추수기를 맞이하여 추수할 것이 많은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할 사명을 다시 생각하시며 눈을 들어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저 밭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