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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제보다 사랑 (요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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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5장 1절 이하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축복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구약의 전 7:4에 있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나 우매한 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사람들이 다 즐기는 명절의 축제 속에서도 자신은 그 축제 속에 마음을 두시지 않으시고 음침하고 괴로운 삶에 지쳐 쓰러져 있는 병자들을 찾아 가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나온 명절은 어떤 명절인가 하는가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명절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부림절, 수전절입니다. 유월절: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 장막절:사십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기념. 오순절:칠칠절 혹은 맥추절이라고 함. 보리 추수를 한 다음 지키는 절기. 부림절:파사왕후였던 이스라엘 사람 에스더의 지혜로 총리 하만의 모략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절기. 수전절:마카비 시대에 성전을 깨끗케 했다는 것을 기념한 절기.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명절은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입니다. 이 때에는 예루살렘에서 32km(80리) 이내에 있는 모든 성인 남자는 예루살렘에 와서 명절을 지키는 것이 법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다섯 명절 중에서 이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명절은 어느 명절입니까? 성경 본문의 말씀 전후를 생각한다면 유월절(4월) 내지는 부림절(3월)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에 “예루살렘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의 뜻은 긍휼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못은 1888년 이후 헤르쉬크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 못 위에는 기념 교회가 설립되어 그 교회 출입문에 본문 요 5:1-9의 말씀을 이십여 개 국어로 번역하여 기록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 베데스다 못은 아래에는 지하수가 흐르기 때문에 때때로 가스와 함께 부글 부글 거품을 내면서 괴어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물이 끓을 때는 천사가 목욕을 하는 것으로 믿고 있어서 질병에서 고통받는 자가 제일 먼저 들어가면 낫게 된다는 전설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물이 끓을 때 신성시하여 예배드린 민족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옛 고대 파사에서나 헬라에서나 로마에서 흔히 있던 현상이었으며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물에 대한 이런 신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 다섯 행각이 있었는데 다섯 행각에서는 모세 5경을 각 행각의 하 나씩 낭독했다 합니다. 환자들은 율법의 낭독을 들으면서 물동하기를 기 다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절 말씀처럼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으나 5절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의 축제 분위기 속에는 계시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찾으신 곳은 축제 속이 아니라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란 못 가에 병자들의 행각으로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은 들뜬 축제 속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온갖 육체의 질병으로 죽지 못해 살 아 있는 고통의 현장 속에 자기 자신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 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축제 분위기의 교회, 즐거움이 넘치는 교회가 머리 드는 시대입니다. 개인주의, 물질주의를 밑바닥으로 하는 삶을 긍정하고 하루 하루 사는 것 을 만족히 여기는 이 시대는 예수님을 광대로 보고 흉내를 내 보고, 여기 에 만족과 흥미를 느끼며 삶을 즐겁고 족하게 영위하는 생활이 현재의 교 회 모습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예수님을 축제의 광대로 보고 위기에 처한 인간들에게 축제 분위기 무드만 만들면서 이것이 사명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모습은 이런 오늘날의 조류와는 정반대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날 축제의 장소 예루살렘에 갔으나 축제 그 속에 서 즐겁게 엔조이하며 웃고, 희희낙락하는 그런 삶을 거부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런 삶과는 너무 거리가 먼 절망만이 있는 곳, 병자들이 신음하는 그늘진 그 장소, 인간의 최대 비명과 저주만이 있는 장소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절뚝발이, 맹인, 손발마른 신체 불구자, 가난에 지쳐 야윈 무리만 있는 그 곳, 세상에 버린바 된 그 곳, 그런 중환자의 수용소에 예수님은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합병원에 가보셨습니까? 좋은 병실과 보호자 없는 무료 병동을 비교해 보며 무엇인가 느껴보셨습니까? 무료 병동은 간호원의 불친절,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고사하고 가축병원의 개만도 못한 대우를 겪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모든 것을 생각 하시면서 베데스다로 가셨다는 본문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생이 당대의 권력가를 찾아가서 자기 삶을 보장받거나 자기 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뒷 배경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버림받고, 소외당하고, 짓밟힌 가난한 대중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세리나 창녀들, 가난한 자, 병자를 찾아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새 삶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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