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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고(人生苦)의 의미 (요 0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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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은 제자들과 함께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한 소경을 보고 제자들이 묻는 말에 대하여 대답한 말씀입니다. 길가에 앉은 소경은 아마 제자들도 잘 아는 소경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날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소경이지만 부모나 친척이 있었더라면 구걸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구걸까지 하는 것을 보니 부모나 친척과 같은 도와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소경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데 그 몸이 길가에 앉아 멸시받으며 구걸하늘 그 경지를 볼 때 우리는 과연 이 세상 생활 가운데는 이렇게 형용키 어려운 많은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이삭 에프슈타인은 그의 저서인 “불안정”에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후부터 불안정은 인류의 재화였다. 인류의 진보의 싸움은 안정을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괴로움, 불안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곳에서나 빠짐없이 있었고, 오늘날도 변함없이 있는 것입니다. 원시인들은 해와 달과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보고 두려워 하였고, 산 과 바다와 바위와 번개와 뇌성을 보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며 갖가지 우 상들을 선봉하여 원시 종교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질병, 불행, 죽음이라는 것은 산너머 물건너 사람들이 가져온다는 선입관과 미신으로 자기 족속 이 외의 사람을 만나면 죽이고 외침을 막기 위해 성을 쌓는 축성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원시인과 같이 현대인들도 괴로움과 불안은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매스콤이나, 전자기술이나, 고도로 발달된 교통수단이나,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하여 왔다고 하나 실은 이와 같은 현대문명의 이기들도 근심과 괴로움과 불안과 걱정을 궁극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여기 나면서 소경된 자가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뜨게 된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로암 못은 둘레가 오백 미터쫌 되는 작은 저수지라고 합니다. 실로암에 들어가는 물 터널 입구에 이렇게 글이 써 있어서 그 기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군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빠진 히스기야의 부하가 곤경 타개책으로 하게 된 일이라.” 그런데 이 작은 실로암 못이 유명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면서 소경된 한 걸인 소년을 실로암 못에서 고치신 이후부터입니다. 실로암이라는 뜻은 7절 말씀처럼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맑은 실로암 못에서 오늘도 육체의 눈과 함께 하나님을 보는 마음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혀주시기를 우리는 바라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영의 눈이 나면서부터 소경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요 3:3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전 2:14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나니…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은 모든 사람의 태어나면서 받은 타락된 영으로써는 이를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죄의 노예가 되고, 그 속성은 하나님의 일을 깨달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노력과 수양도, 명상과 사색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음으로써 새로 거듭난 자가 되어 영만이 열리는 기쁨은 글과 혀로써 그 일부분도 다 표현할 길이 없는 무한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마치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실로암 못에서 눈이 열렸을 때의 기쁨에 수천 배의 기쁨이 더할 것입니다.

1. 인생고는 누구 죄오니이까? 예수의 제자들은 나면서 소경된 이 걸인 소년에 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이(괴로운 인생고가) 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혹은 자기 자신의 죄입니까?” 제자들의 생각에는 이 소경이 나면서부터 이렇게 불쌍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필연 어떤 죄의 값이라고 단정한듯 싶습니다. 사실 이것은 보통 그때 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된 사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당시 이 같은 사상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이 이 소경을 보고 그 이유를 예수님에게서 더 분명하게 듣기를 원했습니다. 이 소경의 원인은 죄 값인데 자기의 죄 값일까? 부모의 죄 값일까? 과연 누구의 죄 값인지 그것이 궁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의 생각이나 태도에서 소경을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없고 인생 문제를 연구하는 한 자료로만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과 태도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가 아니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불쌍한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론적 견지에서보다도 실제적 결과에서 인간고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견지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 하나님의 견지에서 인간고를 보신 것입니다. 사실 질병, 불행, 곤란 등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1) 마 9:2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기록되었고, 요 5:14에는 “그 후에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성전에서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최의 결과로 질병, 불행, 곤란이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영혼에 대한 죄를 멀리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병과 불행을 주는 수도 있습니다. 욥의 여러 가지 어려웠던 시련과 불행했던 일이 다 이것에 속합니다.

(3) 본문의 말씀처럼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한 시련도 있습니다.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고 사명을 주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시련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고를 통해서 인간의 가장 귀한 영혼까지 구원하여 주실 때 가 많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사명인 것을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소경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소경에게 광명을 준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이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자기의 메시야인 것 을 나타내어 그의 영혼까지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같이 질병, 괴로움, 고난, 시련의 생을 사는 소경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견지에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생고가 부여되었던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인생고를 통한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비참한 고난을 이와 같은 사명적인 견지에서, 하나님의 견지에서, 실제적 견지에서 보시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 을 나타내시어 그 사람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난 당하는 것을 어떤 견지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다 때로는 질병으로 고생합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갑자기 병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불란서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종교가인 파스칼의 전기를 보면 그 사람의 머리는 명석하고 좋았습니다. 젊어서 자기 혼자 물리학의 여러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그런 분이 후에 훌륭한 종교가가 되었습니다. 파스칼의 명상록은 지금도 종교가 치고 읽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파스칼이 이와 같은 신령한 은혜를 받은 것은 병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한 번 말에서 떨어져 심한 타격상을 받아 수개월 동안 병석에서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병석에서 고통을 받는 그에게 하나님은 한 친구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밝혀 있지 않습니다.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를 통해서 성경의 말씀을 읽고, 들었고,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깨닫게 되고, 그 가운데서 신령한 은혜를 많이 받아서 훌륭한 종교가로 전환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파스칼로 하여금 그 몸을 낙마케 하여 상하게 한 것은 그 병든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도 성자가 된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부유한 집의 자제로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했던 그가 때 아닌 중한 병을 만나 오랜 세월 병석에서 누워 있을 때에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에게 질병을 주시어서 우리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큰 사명을 받은 것은 애굽 궁전에서 호화롭게 많은 친구들과 같이 즐거이 놀 때가 아닙니다. 미디안 광야에 밀려가서 시내산 한 골짜기 에서 외로이 양을 치면서 홀로 사십 년간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음성 을 기다리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사명을 주 신 것입니다. 엘리야도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며 보호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못 받았습니다. 오히려 호렙산 기슭에 혼자 앉아 낙심하여 죽기를 간구할 때 하나님의 가늘고 은밀한 음성을 들어 사명을 재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도 홀로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음성 을 들어 소명에 응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아라비아에 가서 삼 년간 홀로 고독의 생애를 보낸 후에 비로소 하나님 의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며 우리의 허물로 그가 찔리움을 받으시고, 우 리의 죄악으로 그가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고통 중에 사명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인간고를 통하여 인간고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당하시고 감수함으로 인류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 틀 이론적 견지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 실제적 견지에서, 사명적 견지에서 우리가 인간고나 재난을 만날 때 어떻게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나 타날 수 있겠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수난자와 같이 수고를 하며, 육신을 건지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알고 행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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