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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영광 (요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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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제목을 갖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찌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였습니다. 자연 속에 있는 신비성, 조화성, 그 장엄성, 그 아름다움에서 그들은 신의 임재와 계시를 경험한 것입니다. 산, 강, 하늘, 별, 사계절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윗의 유명한 시편 19편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파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찬양했으며, 시편 145편에서는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나라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새벽에 동터오는 밝은 햇살에서 주의 은총의 날개를 느낄 수 있고, 흉흉한 거센 파도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든 황혼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소나기 지난 뒤 찬란하게 뻗친 무지개에서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보았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자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계 또한 인간 현실의 삶 속에서, 또 영적인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이 승리하고, 진리와 불의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예언자들은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하였는데 사도 요한은 구약에서 이야기 해 오던 하나님의 영광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통해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 성경 본문 요한복음 11장 말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베다니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 삼 남매가 살았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남쪽으로 한 5리쯤 되는 감람산 기슭에 있는 작은 동리입니다. 예수님은 가끔 그 집을 찾아 가셨고, 그 집에 유하기도 하였습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집이었으며, 외롭지만 아늑한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병든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 병은 죽음의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그들의 부모에 관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부모는 일찌기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이 지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실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불안한 심정으로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십니까?”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해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매우 위험하고 불안한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을 향하여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의 하나를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봅니다. 모든 운명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긴 자는 언제나 낮에 다른 사람처럼 정정당당할 뿐입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마르다, 마리아의 비통에 대한 사랑과 동정이 예수님의 마음에 불붙었던 것입니다. 위험한 예루살렘이지만 가서 구원해야 합니다. 비록 원수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해도 예수님은 그 사랑의 이유 때문에 다시 예루살렘 땅으로 가실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먼저가 신앙의 이유라면 나중은 사랑의 이유입니다. 독수리나 매가 오면 닭들은 모두 무서워서 쫓깁니다. 숨어 버립니다. 그러나 병아리를 품은 암닭은 매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독수리를 향해서도 용감히 도전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를 돌볼 여지가 없이 병아리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씨를 봅니다.

1. 절망의 인간 속에 찾아오신 예수 이 때는 나사로가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무덤에 시체로 가 있었고, 그 죽은 자의 시체는 냄새가 날 정도였고, 유대인들은 죽은 자가 나흘이면 영혼이 무덤에서 떠난다고 믿었는데 그 유대인의 풍습으로 하면 죽은 지 나흘이 되기 때문에 영혼이 이미 떠난 상태입니다. 이런 나사로를 향해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슬픔이 극도에 달했고, 깊은 절망에서 울고 울고 또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는 때 늦게 찾아오신 예수님에게 원망스럽고 섭섭함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그 원망스러운 마음, 답답한 사정을 토설하려 나아와 예수님을 맞이했지만 마리아는 그 용기조차 잃고 앉아 있었다 했습니다. 눅 10:28-42에 보면 이 삼남매가 예수님에게 바친 사랑과 정성과 봉사는 컸습니다. 마르다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였고, 마리아는 말씀을 귀하게 들어주는 자세를 보였으며, 특히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는 그 머리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을 수 있는 지극한 섬김의 봉사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원망에 복받친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 11:14-15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야 할 시간과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때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장소는 그 친구 나사로가 이미 죽어서 몸이 썩어 냄새가 나고 인간의 소망은 다 끊어져 위로의 길을 찾을 길 없는 인간 비극의 극치와 장소입니다. 인생의 무서운 절망의 함정, 사업의 실패, 고칠 수 없는 병고, 극한 인간의 상황, 죽음에 우는 막다른 골목에 꼭 찾아오셔야 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곳이며, 모든 비극에 뛰어들어 그 문제의 책임을 지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집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4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 집에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에게 아직 생에 대한 가능성이 보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진리는 언제나 인생이 자기 부정에서 참 삶의 길을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람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고수하고 이 복음에 눈과 귀를 돌리지 않기 때문에 현대 세계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 입에서 선포하신 말씀을 들어야 믿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신 말씀보다 인생에 있어서 더 큰 복음은 없고, 더 위대한 선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많은 조객이 몰려왔습니다만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슬픔에 무슨 위로나 희망을 줄 수 있는 인간의 말은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향하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으리라”고 하며 비통에 잠긴 호소를 하였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 누구도 이야기 못했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는 마르다를 향하여 또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제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무덤 문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듣는 무리들이 깜짝 놀랄만한 큰 소리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나사로의 썩은 시체에 생명이 돌아오고 무덤 밖으로 걸어나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 이 곧 길이요, 생명 그 자체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 앞에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생각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마지막에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부활을 믿되 전통적인 신앙인 말세에 성도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나사로가 지금 부활할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부활은 주님을 믿는 그 때부터 구원이 있음을 말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여기에 대한 마르다의 말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적극적인 신앙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이 무덤 문의 돌을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믿는다고 대답하고서도 믿지 못하여 “주여. 나사로의 시체는 이미 나흘이나 되었으니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않더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냄새가 나고 나흘이나 되는 시체, 이런 어려운 때가 바로 예수님의 영광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이런 암흑의 순간에 그 광휘를 발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생애에 가장 어둡고 불쌍하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생에도 이런 어려운 순간, 냄새가 나고 썩은 시체처럼 아픔과 불행이 엄습할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아픔, 슬픔, 외로움, 고난, 이런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이 바로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탄식하지 마십시다. 그 순간이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순간이요 은혜와 진리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더디 오심은 마르다로서는 견딜 수 없는 기다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로 기도 소리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이 아니며, 우리의 눈앞에 전개된 사정만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의 유무를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내와 복종을 시험하시기 위해 더디 은혜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복종의 태도를 길러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응답되지 않을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도를 계속하여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아무리 늦어지더라도 마침내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권능의 주님이시니 낙심하지 마십시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고, 절망 중에 빠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시니 믿고, 또 기도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에게 간구하여 응답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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