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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어도 사는 생명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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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과 26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전제하고 태어난 인생들에게 유일한 희 소식이며, 유일한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한번 죽어 없어지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느냐? 그것은 비과학적이며 비합리적인 말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반대로 부활이 있기 때문에 합리적이요 과학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전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부활에 대해서 강력히 역설하였습니다.

1. 인간의 생명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다시 사는 생명은 자연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엄동설한에 모든 초목 과 곤충들은 고요히 동면에 잠겨 있다가 양춘가절을 당하여 새 생명으로 소생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말하기를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잠시 동안 동면 중에 있다가 잠이 깨는 것이지만 인생이 죽어 썩고 없어진 데서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초목이나 곤충의 세계에서만 동면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 도 죽음을 가리켜 영면이라 합니다. 성경에 말씀하신대로 “영은 그 주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조물주를 기억 하라”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인생이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은 위로 올라가고 육은 흙인 원소로 돌아가 고요히 잠자고 있다가 만물이 봄이 되면 소생함과 같이 우리의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의 나팔 소리에 잠들었던 성도들이 무덤을 헤치고 부활의 새 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음성도 녹음 테프에 오래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것입니까? 모양이 없는 음성도 사라지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인생의 몸과 영과 혼이 어찌 없어지겠습니까? 옳습니다. 성경에 말씀하기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주가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있는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에 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계 20:13에 보면 “최후의 심판에 바다 가운데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내어 놓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다고 해서 그 생명의 가치가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계 20:13의 말씀대로 악한 일을 행한 자의 생명은 비록 그것이 영원하다고 해도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그런 부활은 없는 것이 그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불신앙의 생명,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더 불행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중에 지옥 불 속에 있는 부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지옥 불 속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어서 절규하는 그 부자의 생명이 영원하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밖의 인생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요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2. 죽어도 사는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요 5:28-29의 말씀에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신 본문 11:25의 말씀과 관계됩니다. 나를 믿는 자라는 말과 살아서 나를 믿는 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신앙인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죽어도 사는 생명입니다. 나사로란 한 청년의 생명은 예수님을 믿는 자의 생명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었던 나사로의 생명은 죽어도 사는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 생명이 부활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났을 때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주님의 음성과 접했을 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겔 37:1-10의 말씀대로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아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도 여호와의 말씀이 접했을 때야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를 믿는 자는 주님의 피로 사신 생명이기에 가치있고 값이 비싼 생명이며, 버릴 수 없는 생명이 되므로 그의 생명은 죽으나 사나 살아있는 생명인 것입니다.

3. 죽어도 사는 생명은 부활을 믿는 생명입니다 빌 3:21에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천한 몸을 자기 영화로운 몸과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예수님처럼 거룩한 영화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노인은 노인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요, 어린애는 어린애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며, 불구자는 불구자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부활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육체는 다 육체가 아니니 사람의 육체도 있고, 짐승의 육체도 있고, 새의 육체도 있고, 물고기의 육체도 있나니 신령한 육체도 있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물고기는 물 속에서만 사는 체질이 있고 사람은 땅 위에서만 살 수 있는 체질을 가졌으니 이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지 않고는 결단코 영원한 천국에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에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주님의 부활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썩은 것으로 심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체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같이 구름을 타고 승천할 수 있는 몸으로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몸, 피곤한 괴롬도 죽음도 없는 몸, 부자도 가난한 자도 아닌 귀천이 없는 귀한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말씀하기를 “부활하는 자의 행복이여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은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시 살리시기 위하여 그 무덤을 헤치고 사흘만에 부활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죽음을 피하려 하나 피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하여 주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의 보증으로 오늘 나사로의 무덤에서 해방시켜 그 죽음의 사슬을 풀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어도 사는 생명, 그것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가진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생명을 보유한 사람은 박해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생명은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아무도 그 생명을 해치지 못합니다. 속함을 얻은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샘 솟듯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주님의 이 귀한 은혜를 받았으니 세상의 염려를 너무 두려워할 것이 아니요, 담대함으로 신앙 가운데 굳건히 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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