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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이적 (요 1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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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잠겨있던 베다니 촌을 제자들과 함께 찾아드신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장사하고 굴을 막기 위하여 가져다 준 돌을 옮기라고 하신 다음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 하시기를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하려 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목적이 무엇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적이란 것을 정의하면 인위적이나 자연적인 것으로 연유하지 않고 자연계에 나타난 사건을 의미합니다. 어떤 비행기가 상당한 무게의 물품을 싣고 태평양을 건너는 일, 라디오를 통한 소리, TV에서 먼 지방을 볼 수 있는 것, 녹음기에 소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이적이 아니요 물리학적 법칙을 이용한 것 뿐입니다. 소위 이 적이란 인위적이나 자연적으로 물리 화학적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원인과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하에 되어진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은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활동 역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주의 지배자 하나님, 자연의 지배자 하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이적을 가능케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이나 어떤 민족 사회 국가를 향하여 특별한 계시를 주실 때 확인키 위하여 기적 을 행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사사 기드온이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님 되시는 표를 내게 보이소서” 하고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어 가져다 반석 위에 두어 여호와의 사자로 하여금 어떤 표정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의 사자는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전병에 대니 반석에서 불이 나와 그것을 태워서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보내신 것을 확인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적을 행하시며, 이적을 통하여 확인시키시기 때문에 이적은 가능하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의 저자들만 보더라도 마태와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들어 있어서 저들 자신이 주님의 이적들을 친히 보았으며, 마가는 열두 제자의 수에는 들어 있지 않았으나 주님의 이적들을 친히 본 것을 얼마든지 증거하였고, 누가는 누가복음에는 물론이요 그의 저서 사도행전 서문에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서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심을 시작하심부터”라고 하여 그의 본 사실을 전한다고 의사답게, 과학자답게 기록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적에 관한 사실을 읽어 나간다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이나 나면서 눈 먼 소경을 고치신 일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을만큼 많은 이적들이 복음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과 승천을 하신 후 성령받은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많은 군중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여 가로되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전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 은 물론 베드로의 이 증거를 듣는 이들 중에 예수의 이적들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한 일 이 없었다면 군중 앞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베드로는 생명이 위험한 자였을런지도 모릅니다. 복음은 이적과 함께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를 말하는데 있어서 이적을 빼 버리면 아무 것도 쓸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이적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적의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 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랍비며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이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에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이 이적을 통하여 증명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 가운데 당시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반신불수 병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네 친구가 병든 자를 주님 앞에까지 메고 왔으나 너무 많은 무리들이 몇 겹이나 주님을 둘러싸고 있음으로 예수님에게 접근할 수가 없어서 지붕을 뚫고 병든 자를 예수님 앞에 침상을 매어 달아 내렸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당사자는 물론 친구들까지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놀라는 동시에 “참람하도다. 한 분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하고 마음에 의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으로 의논하는 것을 아신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과 일어나 상을 가지고 가라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시고는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사 또 그대로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이적은 두 가지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 사할 권세가 있음을 보인 것이요 둘째, 이적으로 이 불쌍한 사람에게 크신 축복을 주시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자신의 부활로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고, 무덤 속에 그대로 계시지 아니하시고 그의 말씀하시 던대로 영광 중에 부활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이적과 행적과 부활은 우리 구원 얻을 자의 계시요, 그림자적 예언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참된 이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소경과 절름발이와 귀머거리와 벙어리와 사망의 고통과 영원한 형벌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입니다. 이 모든 이적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시고 동정하시며 구원코자 원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적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더 굳게 하는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함에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이적은 가능합니다. 이적은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함으로 우리의 신앙을 확실케 하며,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축복받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본문의 나사로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나타남이며, 또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은 물론이지만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의 표본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 서 “일어나라”, “무덤에서 나오라”고 외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다 이 나사로와 같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나사로는 부활 하였으나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의 이적이야말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확실한 실상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의 참 이적에 참여하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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