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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침받은 점장이 여자 (행 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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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도가 기도하러 가는 길에 귀신들린 여종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즉 기도하는 곤에서 이같이 가련한 여성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빌립보에서의 첫째 사건은 루디아의 신앙에 관한 일이요 둘째 사건은 점치는 여가가 고침을 받은 사건으로 다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서로 대조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 신분이 자유인과 종이요 내용이 영적인 신앙과 육적인 병고치는 일이요 결과에 있어서 첫째 사건은 환영과 대접을 받았고 둘째 사건은 매맞고 옥에 갇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종이였습니다. 즉 노예였습니다. 그 때의 노예는 대개 로마 출정군에게 잡혀 온 포로인 바 이 여자는 점치는 사귀가 들린 자였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루디아의 집에서 기도처로 가는 길에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그 일행을 따라 오면서 소리를 지르되 17절에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날마다 이렇게 말함으로 바울이 더 참을 수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도 神入流하였다고 외친 자들이 많았습니다. 원산의 유화, 평양의 이 유신 등의 여자들이 神에 접촉되었다고 하면서 이를 팔아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강신상을 보인다고 백 남주, 한 영희는 예수 교회 새 교단을 만들었고 이 용도, 황 옥주, 이 호빈이 이에 응하였고 통일교 문 선명이 오늘에 그 왕좌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외침을 바울은 더 참을 수 없어 괴로워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좇았을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날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 구원의 길을 선포한다”고 하니 말은 좋은 말이요 전도에 유익한 것 같으나 사도 바울은 귀신들린 자의 말을 결코 전도에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귀신들린 여자는 하나님의 복음을 외치는 것 같이 하여 자기도 하나님의 종처럼 위장하여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요 교회를 분열시켜 그 사악한 위선으로 점을 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은사인 양, 계시의 은사인 양 오도하여 하나님을 전도하는데 방해하므로 사도 바울은 이를 제지했습니다. 바울은 여종을 불러 불쌍히 여겨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아 주었으니 이것은 전도자의 정당한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루디아와 같은 경건한 여자만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린 여종도 불쌍히 여기사 고쳐 주십니다. 그녀는 그 후 예수를 믿게 되어 루디아의 교회의 교인이 된 것으로 믿어지나 확실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렇게 서양의 첫 교회 빌립보 교회의 창설과 더불어 장사하는 여자와 노예가 먼저 회개하고 예수를 먼저 믿게 되었다는 사실은 서양 여자들에게 일대 축복을 내리시는 전도라 하겠습니다. 이 귀신을 쫓아낸 것도 바울이 기도함으로 내어 쫓았다고 하였으니 기도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합당한 기도를 하면 꼭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창 18장-19장에 소돔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의 아브라함의 기도는 치인 10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는 말아달라는 것이었는데 이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롯과 그 가족도 구원을 얻었으나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 고모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에서 해방을 얻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기도를 잃어버린 북 이스라엘은 망하고 기도를 계속한 남 유다는 잠시 동안이나마 멸망을 면하고 남 유다를 통해 바벨론 포로 후 다니엘과 예레미야를 통해 70년 포로 이후 유대왕국을 다시 회복하고 성전도 다시 재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강한 힘의 사로잡힘을 따라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를 붙잡은 강한 힘은 무엇입니까?

(1) 성령에 붙잡혔습니다. 그는 당초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으나 성령께서 이를 허락지 않으심으로 드로아에서 기도하는 중 주의 뜻을 기다리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빌립보에 오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 방문은 자의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의한 조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성령에 붙잡힌 자는 전도하는 것도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롬8:9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며 갈5:25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 따라 사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종들은 진퇴와 거취를 성령의 인도대로 순종해야 마땅합니다.

(2) 사랑에 붙잡혔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은 전도나 봉사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3)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철판과 철판 사이에서 압착을 당하는 깨알이 바스러지고 터져서 기름이 되어 흘러 내리듯이 말씀에 압착을 당하는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미칠 것만 같은 절박감 때문에 곤욕을 당하면서도 전진을 합니다. 그는 말씀에 붙잡혀 끌리고 밀리는 사도였습니다.

(4) 사명에 붙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토록 붙잡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며 또 바울만이 이토록 혹사를 당해야 할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대답하기를 그것이 곧 자기의 사명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대답할 것입니다. 사명이란 하나님의 시키는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있는 목숨이라도 다 내어놓고 존재 의미를 다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니 사도 바울은 사명을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의무감으로 억지로 하는 선교 활동은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힐 래 성령의 포로가 될 때 죽음의 선교의 사명의 붙잡힘을 받은 역사가 계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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