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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의분 (행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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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에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 ‘마음에 분하여’ 라 하였습니다. 그 뜻은 보통 분한 것이 아니라 격분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격분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을 내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혹 분을 내는 기회가 있을 지라도 분을 오래 품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약1:19-20에는 “성 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엡4:26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했던 사도 바울이 분을 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3장을 읽어보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안식 일 아침에 어떤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 가운데 손 마른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가 아니 고치시는가를 보려고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마음들이 완악함을 보시고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분하여 둘러선 사람들을 보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분노 가운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사사로운 분노입니다 사사로운 문제. 사사로운 이해 관계, 그리고 개인 문제나 감정 때문에 노하는 그런 분노가 있습니다. 이런 분노에 대하여 성경은 분을 내지 말며 이런 분노는 더디하며 오래 품지 말고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2. 둘째 분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공연한 분노입니다. 보통 말로 의분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회 안에서 불의와 죄악상을 볼 때 의로운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악을 제거하기 위한 분노이며 봉사와 희생의 활동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발하신 분노는 이런 의분입니다. 성경엔 이런 의미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분노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덴에 관한 사람을 만나기보다 신들을 만나 보기가 더 쉽다’라는 격언의 말처럼 사람 수보다 우상의 수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이 현상을 보고 사도 바울은 통분하였습니다. 이 분노는 성인에게는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학문의 도시, 법률, 문학, 예술, 철학, 인문의 도시가 우상과 음란으로 부패하였을진대 천하에 모여든 학도들이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아덴의 부패는 세계의 암흑이요, 인류의 앞날은 비참일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덴의 지식, 예술, 부귀, 권세, 철학, 학문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기에 썩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 온 목적이 단순히 관광 목적으로 왔더라면 분을 내는 것보다, 아덴의 모든 문화를 보고 감상하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예술가로 아덴에 왔으면 우상을 제작하는 솜씨에 매력을 느끼고 감탄사를 던졌을 것입니다. 그가 역사가로 왔더라면 조각 하나 하나를 보며 시대의 발전상을 알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아덴에 왔기에 우상 많은 아테네, 음란한 아테네를 보고 격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세상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그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앙적 관점으로 아덴 거리를 관찰하며 다녔기에 우상을 볼 때마다 격분하였던 것입니다. 혹 우리들이 매일의 생활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산다면, 아덴 사람들처럼 우상 속에서 살고 있으나 하나님의 신앙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고, 세상 우상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할 것이며 세상의 우상에 대해서 새로운 것이 있을까 하며 고고학자와 같은 기분으로 살아 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테네의 사도 바울의 태도와 같은 신앙 제일주의로 매일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우상에 대하여 분내는 생활입니다. 잡귀신과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아덴에 있어서, 사도 바울의 분을 보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 사람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자 하는 그 심정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모두 바울과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이와 같이 의분으로 말미암아 주의 일에 힘쓰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수도원 제도의 원조가 된다는 성 안토니오의 전기에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돈 많은 부자집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또 지위도 상당한 위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소년 시절 때. 한 번은 성경을 펴서 읽어 내려가다가 마태복음 19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어떤 돈 많은 부자가 예수 앞에 와서 영생을 얻는 비결을 물었던 기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네가 십계명을 알지 않느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런 모든 계명을 말하면서 “네가 이 모든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는 “그 계명을 내가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러면 좋다. 네가 이제 한 가지 할 것이 있는데 가서 네게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돈이 많은 까닭에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토니오는 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하시는 말씀이 곧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깨달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돈이 많은고로 근심하여 물러갔는데 나도 물러가야 하느냐?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 속에 격분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자기 누이에게 생활할 수 있는 재산을 얼마 분배하고 난 후 자기는 아무 것도 없는 빈손으로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위하여 몸바쳐 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높아갔고 이런 명성을 듣고 찾아온 많은 제자들이 있어서 안토니오는 세상에 최초의 수도원을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안토니의 생활은 말하자면 의로운 분노 가운데서 그런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음란과 방탕과 세상의 우상들이 가득한 이런 부패한 사회인 까닭에 좀 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청결한 생활이 필요합니다. 주를 위하여 좀 더 거룩한 의분을 냅시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의분을 가지며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의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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