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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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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를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선생께서 신령한 면에 있어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장성한 사람을 대함과 같이 아니하고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기 때문에 어린 아이와 같이 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밥으로 먹이지 못하고 젖을 먹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전 14:20에 보면 “지혜에는 어린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전도를 받아 세워진 교회이고 바울의 신앙으로 훈련받는 교회이지만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아직도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교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 선생님은 고린도 교인들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였는데 어떤 신앙을 가리켜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였는가를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바울 선생님도 처음에는 이런 신앙을 가졌다가 성장한 후에 버린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성장한 후에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성장한 신앙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무엇을 버렸는가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편협과 고집주의의 신앙 4절에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이 나는 바울에게서 은혜를 받았다고 바울파라 하였고 나는 아볼로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아볼로파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의 신앙은 편협하고 고집주의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신앙을 버렸습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아볼로나 바울이나 게바나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의 면은 다르지만 다같이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신앙만이 참이요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는 전부 부정하는 태도로 나오기 때문에 교회가 혼란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조금만 잘못하면 편협과 고집에 흐르기 쉽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의 생각하는 것이 유치해서 작은 일을 가지고 싸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랑 하나를 가지고 싸우고 다 깨어진 유리병을 가지고 싸우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저 별은 내 별이라고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세기의 교회가 부패했을 때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사흘이나 싸웠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어린 아이와 같기 때문에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분쟁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어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시 교회 신부가 예배를 집례할 때 입는 까운은 어떤 색은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일주일간이나 싸웠다고 합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얼마나 편협하고 고집적인 신앙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제 2차 전도여행시에 마가, 요한을 데리고 떠나느냐 안 데리고 떠나느냐 하는 문제로 분쟁이 있을 때도 바울은 편협적이고 고집적인 신앙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서는 비극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바울은 편협한 고집을 버렸습니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세계적인 대 사도가 된 것입니다.

2. 감각을 통하여 영적 은혜를 받으려는 신앙은 어린 아이의 신앙 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사물을 식별하는 것은 오관을 통한 여러가지 감각을 통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우기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중에서도 시각, 청각을 중요히 여깁니다. 그래서 어린이교육에 있어서 시청각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지식을 얻는 영적 은사를 세상의 물질을 식별하는 것과 같이 시각이나 청각이나 촉각이나 취각을 통해서만 얻으려고 한다는 것은 그 신앙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눈으로, 귀로, 손으로 만져서 받는 은혜도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의 가시관을 보았으며 삼층 세계에도 가 보았고 밤에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감각을 통한 은혜였습니다.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늘문이 열린 것을 보고 그대로 다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변화산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한신 것을 친히 보고 확고한 신앙을 가지게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봄으로써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 서신 가운데 한번이라도 이런 은혜를 받은 것을 자랑하고 장려하여 가르친 곳을 보셨습니까?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정도라면 바울은 가르쳤을 것입니다. 고전 14장에는 방언이라든지 예언하는데 대한 교훈을 하시고 어린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그보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어린 아이와 같이 취급한 까닭은 이 까닭입니다. 아직도 지식이 얕은 유치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는 손뼉을 치며 유희하며 시청각 교육법을 사용하지만은 장성한 대학생들에게는 이론 교육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대학생들에게 유희를 가르칠 때 사과를 보이며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과지요”하며 교육을 한다면 대학생들은 모두 웃을 것입니다. 바울이나 요한도 처음에는 감각을 통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것은 아직도 초보적이요 신앙이 성장하기 전에 가지는 체험입니다. 물론 신앙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어린 신앙은 성장하여 어른스런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성장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키가 자라고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면 안 되겠습니다. 초대교회 중에 에베소 교회나 서머나 교회나 안디옥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들은 빨리 성장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가장 자라나지 못하고 어린 아이의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교회는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히 5:13에아직도 어린 아이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 말씀하기를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바울 선생님이 살아서 우리 한국교회에 오셨다면 아마 “한국교인들아 너희들은 100주년 동안 자랐으니 이제는 어린 아이의 신앙에서 떠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분량이 장성한 데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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