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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큰 은사를 (고전 12: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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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2:31에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하였고, 골 4:6에는 “더 큰 은혜를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행하는 일을 저도 할 터이요 이보다 큰 일도 행하리라”는 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믿기만 하면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태평양의 물고기가 목이 말라 죽었다면, 또 요셉의 7년 풍년든 창고에서 생쥐가 배고파 죽었다면 얼마나 가엾은 일입니까? 아니 그보다 더 불쌍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태평양 해수보다 더 많고, 풍년든 요셉의 창고의 곡식보다 무궁무진 하건만 그 은혜를 받지 못하고 영혼이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속을 태우는 노릇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중에 몇을 세웠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각종 방언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은사는 성령의 역사로써 한 하나님의 주재하에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당파가 있었습니다. 어떤 자는 바울에게, 어떤 자는 아볼로에게, 어떤 자는 게바에게라고 하며 당파를 지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 안에서는 자기들만이 지혜있다고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 앞에는 미련한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실상 지혜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는 어떤 자는 자기가 유능하다고 뽐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은사의 능력은 다 하나님의 선물인데 어찌 자기 것인 양 자랑할 수 있느냐고 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서 겸손하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음행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믿는 사람끼리 세상 재판소에 나가서 송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습니다. 또 교회 안에서, 은사받았다고 제각기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니 교회가 두 패로 나뉘어져 교회가 갈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도 중요하나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 자신을 표준형 인간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있어서 불협화음을 빚어내게 됩니다. 상품에 대해서는 그런 표현이 용인될른지 모르지만 사람에게 대해서만은 표준형이라는 말이 부당합니다. 흔히 표준형 체격을 운운하는 말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 말도 외람된 말입니다. 사람의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무병(無病)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선 내 자신이 결코 표준형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다 나처럼 되어지기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가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그를 불합격 인간으로 낙인을 찍거나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그처럼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도 나처럼 되어질 수 없는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나처럼 되어지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마땅합니다. 사실 나와 같은 사람이 나 외에 또 있다면 나는 나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가 세상에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내가 귀하게 쓰여지는 것입니다. 남을 나에게 예속시키려 하지 말고 각자의 개성을 따라 각각 충실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회는, 그리고 교회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간직하며 명랑하고 활기있는 전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기대와 너무 어긋나기 때문에 자녀에게 대해 실망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대로 쓰여질 곳이 따로 있게 마련이니 실망보다는 이해와 협조로 피차의 인간관계에 부드러운 기름을 쳐가며 살아갈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욱 귀한 은혜의 선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모든 성령의 선물이 다 귀하지만은 가장 귀한 은혜의 선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960년도 연회에서 두 고소사건이 들어왔습니다. 이때 시두엘 선교사가 이 문제를 처리했습니다. 이 분은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코자 했습니다. 이 문제를 취급하는 동안에 시두엘 선교사는 고소를 제기한 이에게 세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1) 우리 신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영적문제가 더 큰 문제가 됨을 믿습니까? 2) 기도하고 고소했습니까? 3) 상대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소하였습니까? “이러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인이 취할 방법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여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계명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제일 먼저이지만 행위에 있어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먼저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이 황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의 호(號)는 퇴계였습니다. 이 퇴계 선생은 도학과 야학에 정통하신 분이요, 덕이 높은 분입니다. 이 분에게 아내가 있었는데 아주 반편이요, 못났다고 합니다. 한번은 선조의 제사를 지내는데 제삿상에 놓여진 대추를 그 부인이 달라고 조르니까 퇴계 선생은 잠자코 집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어른들은 못마땅하게 여기어 크게 책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퇴계선생은 “우리는 다 조상들 앞에서 모두가 어린 아이올시다. 어린 아이가 철없이 하는 일인데 무얼 그러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번은 조정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겉옷의 고름이 떨어져 부인보고 달아달라고 하였더니 부인이 등 뒤에다 달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퇴계 선생은 아무 말없이 앞으로 둘러메고 입궐하였습니다. 이때 임금님이 퇴계 선생의 겉옷에 띠띤 것을 보시고 보기좋다 하시면서 조정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퇴계 선생을 본받아 모두가 띠를 띠라고 하여 그 후부터 도포에 띠를 띠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퇴계 선생의 덕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곧 관용을 통하여 관용의 큰 덕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크신 덕 까닭에 죄인된 우리가 모두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아닙니까? 사랑이 있으면 힘든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생의 길에 있어서 최선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아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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