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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장한 신앙인 (고전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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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에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 아이같은 신앙은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혜에는 어린 아이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버린 어린 신앙은 무엇이겠습니까?

1. 편협와 고집주의의 신앙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신앙만이 옳다고 하며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는 전부 부정하는 태도로 나오기 때문에 교회가 혼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조금 잘못하면 편협과 고집에 흐르기 쉽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의 사고방식이 유치해서 작은 일을 가지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중세기의 교회가 부패했을 때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사흘이나 싸웠다고 했습니다. 이 모두 신앙이 어리기 때문에 싸운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시 교회 신부도 예배시까운은 어떤 색을 입어야 하느냐로 1년을 서로 싸웠던 것입니다.

2. 감각을 통하여 영적 은혜를 받으려는 신앙은 어린 아이 신앙입 니다 오늘 우리 사람들이 모든 사물을 식별하는 지식은 오관을 통하여 오는 시각이라든지 취각이라든지 여러 가지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는 시청각 교육이 더욱 필요합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자식을 영적 은사와 세상의 물질을 식별하는 것과 같이 시각이나 청각이나 촉각이나 취각을 통해서만 얻으려 한다면 그 신앙은 어린 양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 눈으로 친히 보고 귀로 들었습니다.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삼층천에 올라가 본 경험이라든지 밤에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고 한 것이라든지 빌림보 옥 가운데서 된 일이라든지 바울은 친히 시각을 통해서, 청각을 통해서, 감각을 통해서 영적 은사를 받은 것이 확실합니다. 사도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밧모섬에서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와 24장로와 네 영물과 유리 바다와 황금 길을 친히 눈으로 보았습니다. 베드로도 물 위로 친히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친히 본 후에야 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나 사도 요한이 언제나 이런 환상 속에서 산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전도 여행시 삼층천에 한번 가 본 후에는 한번도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 신앙이 약해진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글 가운데 이런 일을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권해 본 일이 있습니까? 한번도 없습니다. 신앙의 정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전 14장에는 방언이나 예언에 대하여 교훈을 하시고 어린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그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어린이처럼 취급한 까닭이 이 까닭입니다. 유치원 어린이에게는 시청각 교육을 하고 있지만 대학생 교육은 이론 교육입니다. 대학생들을 유치원생처럼 사과를 보이며 “이것이 무엇이요” 하면서 교육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감각을 통하여 은혜받은 것은 옛날에 다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과정이 필요합니다. 저도 이런 신앙과정을 통과했습니다. 이런 신앙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것은 신앙의 초보적이요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장성한 후에는 어린 아이의 것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중에 에베소 교회나 안디옥 교회나 서머나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빨리 성장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가장 자라나지 못하고 어린 아이의 신앙 그대로 있던 교회는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이제한국교회도 100년으로 자랐으니 어린 아이의 신앙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3. 이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고전 3:18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25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지식은 교회에서 필요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거나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지식이나 힘을 믿고 교만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오히려 겸손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믿으면 지식이 필요없고 지성인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자는 잘못이요 못 배운 보수주의 교역자와 교인들이 지식인을 멀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가 미련하다는 것은 지혜의 근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진리의 표면적이며 피상적인 부분만을 아는 지혜이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지혜를 깨닫지 못함도 다 미련한 지혜라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지혜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눈멀고 병든 지혜를 다시 새롭게 하여 지혜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한 지혜가 되도록 재 창조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4. 누가 지혜에 장성한 사람입니까? 지혜에 장성한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한다면 지혜에 장성한 사람은 그리스도적 인생관을 확립한 사람을 말합니다. 기독교적 인생관을 확립시킨 사람은 인생파 진리와 우주 전체를 인식하고 관찰하게 됩니다. 저 들에 피어있는 백합화 한 송이를 볼 때도 기독교적 인생관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불신자 지성인들은 저 들에 피어있는 백합화 한 송이를 생물학적 혹은 심리학적으로 판단하고 말 것이지만 기독교 인생관을 가진 자는 진리를 근본적으로 분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가진 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논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도전해 오는 지성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올바른 인생관을 심어줄 사명이 있고 또 믿을 바에야 감각적 어린 신앙을 떠나 성장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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