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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모습 (고후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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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삶은 여러 면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생활은 빛 안에서의 생활이어야 하며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어둡고 캄캄한 곳입니다. 이곳에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성도는 과연 믿지 않는 자에게 얼마나 본이 되고 있는 가를 생각할 때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세속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까지 만연하여져 있어서 누구가 참 교인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타락되어 가고 있으니 진정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음란하고 패역한 이때에 그리스도인으로 흠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성도의 생활 태도

(1) 의와 불법은 합할 수 없습니다(도덕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면서도 죄는 미워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이 호리라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낸 것은 그곳이 도덕적으로 타락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땅으로 이주시켜 거룩한 자손을 번성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성도는 불법과 절대 합할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도덕적 타락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 불의를 지적하다가 결국 죽었으나 세례 요한의 외침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극도로 타락되어 가는 오늘날의 세례 요한은 누가 될 것입니까?

(2) 빛과 어두움은 사귈 수 없습니다(사회적으로). 빛이 있는 곳에서는 어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작은 등불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비추어야 합니다. 옛날 철인 디오게네스가 진리를 찾기 위해 백주에 등불을 켜고 거리에 다녔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로마서 12:1-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하여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악의 세상에 살고 있지만 물들지 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습니다(종교적으로). 기독교는 살아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종교입니다. 이런 신앙고백과 다른 종교와는 일체 조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악마)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마귀의 세력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었으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습니다. 종교를 가칭해서 교회를 짓밟고 있고, 교인을 유혹하여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이비와 이단을 적극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앞으로 순수한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나가야 될 것입니다.

2. 성도의 생활 지위

(1) 성도는 하나님의 전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인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은 거룩해야 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말이 구별되어야 하며, 마음이 구별되어야 하고, 생활이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구별되게 살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어려운 시련도 많았으나 굴하지 않고 견디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항거하는 세상에서 구별되어 방주에 들어가 멸망의 세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도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성도의 위치를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를 가나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제일되는 도덕은 겸손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겸손한 다윗을 향하여 행 13:22에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사랄 앞에 겸손한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도의 생활 목적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요, 내 명예나 지위나 지식이나 물질을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분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에는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아울러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개척자 존 녹스의 무덤에는 “여기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주를 의지하는 힘이 세상의 힘보다 더 강하여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영육의 구원 우리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육의 구원입니다. 신비주의에 치우치고 있는 자들에게는 육신을 지나치게 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페르샤의 이원론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영과 육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2절)고 했습니다. 영혼의 구원이 중요함과 같이 육신의 부활도 가장 귀한 것입니다. 영혼만 구원받으면 되지 육체야 아무렇게나 되어도 관계없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육이 함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의 생활 표준은 이 죄악의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며, 세상에 물들지 말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끝까지 승리하며 살아갈 때 영육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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