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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당한 분배 (고후 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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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란, 그것을 모아들이는 방법과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과 과정도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애써서 벌어들인 재물을 가치있게 해 줌이요, 둘째는 소유자의 인격을 빛이 나게 해주는 까닭입니다. 실로 재물의 가치란 그 분량의 다 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 방법의 정당성 여부데 달린 것입니다. 비록 적은 재물이라도 바로 사용하면 그 재물은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아무리 많은 재물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가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비록 적은 소유라도 옳게 사용하면 그 인격이 향상되지만 반대로 많은 소유라도 부정하게 사용하면 그 인격의 가치가 저하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맥코내기는 “소득은 금전을 만들고 분배는 사람을 만든다”고 말했으며, 엘카이털은 “청년이 낮에 번 돈은 그 주머니 속에 넣으나 밤에 쓰는 돈은 그 품성에 쏟아 넣는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 품성대로 금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고, 금전을 사용하는대로 또한 그 품성이 형성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금전을 장만하고 사용하는 동안에 금전은 사람을 지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애써 번 돈을 잘못 사용해서 그 재물을 무가치하게 만들며, 그 돈을 버느라고 애쓴 수고를 헛되게 만들고, 또 돈을 쓰고서도 남에게 욕먹는 사람이 될 까닭이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바르게 사용해서 재물도 가치있게 하고 그것을 모은 수고도 보람이 있게 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의 인격도 빛이 나게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득에 대한 정당한 분배를 할 만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악한 종으로 정죄되고 말 것입니다. 정당한 분배를 하려고 하면 먼저 재물이 내게 수입되어 들어오는 과정을 정당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대개 재물이 우리에게 수입되는 과정에는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1. 자신의 노고 수고 없는 소득이 없고 노력 없는 수입은 없습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김매고 물주는 땀을 쏟아야 추수의 기쁨을 얻게 되며, 어부는 노도풍랑과 악전고투 끝에야 풍요의 즐거움을 맛보게 되며, 광부는 지하 수백 척의 갱도 속에서 결사적인 모험을 해야 굴 밖에서 기다리는 처자의 호구지책을 마련하게 되며, 상인들은 영하의 엄동에도 얼어오는 손발을 구공탄 불에 달래가며 만나는 손님에게 일일이 친절을 베푸는 수고를 종일 반복해야 밤늦게 결산의 흐뭇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지 못해 지고 있는 저주스러운 짐이 아니라 이마에 땀 흘려 먹고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법칙에 순응하는 정당한 생활수단입니다. 그러기에 살후 3:10에서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사도 바울은 게으른 자에게 경고했습니다. 재물은 수고의 문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2. 국가와 사회의 혜택 독불장군이란 말이 있지만 차라리 독불인생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장군은 커녕 사람은 자기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갈 생각부터 말아야 합니다. 어거스트 콤프의 말대로 인간은 과연 나면서부터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재물의 수입과정에도 이 법칙은 무시되지 않습니다. 무슨 사업이든 막론하고 세상에 사회적인 협조가 없이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되어지는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기업주는 종업원의 노력 제공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며, 생산업자는 소비층의 협력이 없이는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소비자는 생산업자의 왕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라는 기구의 보호가 없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보장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개인의 수고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뒷받침이 있고서야 되는 것인즉 재물이 내게 들어오는 제 2의 문은 사회와 국가의 혜택이란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축복 자신의 수고와 사회적인 협조가 최대한 발휘된다고 해도 그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보태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지나간 날들의 장마로 인한 한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풍년 시절보다 인적의 수고가 몇 배나 더했고, 정부의 한재 대비책도 수십억이나 투자되었고, 각계 각층으로부터의 사회적인 성원도 막대했지만 추수부재의 한재민들이 혹한 속에서 허기짐을 면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지혜높은 솔로몬 왕은 시 127편에서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 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재물이란 나의 수고와 사회의 협력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세 개의 문을 통해서 내게 들어오는 것임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수입된 재물은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이 자명하여 집니다.

(1) 나의 노고라는 문을 통해서 생겨진 재물인즉 내가 분배받아야 할 부분도 있어야 합니다. 일부의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든지 국민의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있으며,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그러나 내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국가의 보호와 사회의 혜택에 힘입은 바가 또 큰 것인즉 국가와 사회가 분배받아야 할 몫도 있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세금이란 제도로 국가에 납부되는 것이며, 의연금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에 기증되는 것입니다.

(3) 어느 나라든지 재산의 분배에 있어서 이상 두 가지는 인정되고 있으며, 또 실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고 말면 그것은 정당한 분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 노력과 사회의 협조와 보호 외에 하나님의 축복이 보태져서 얻은 소득이니만큼 당연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부분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헌금도 대인의 소유권이나 국가에의 납세처럼 당연한 것이고, 의무적인 것입니다. 만일 개인의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으면 공산 독재사회 이상으로 국민의 저주를 받을 것이며, 만일 나라의 세금을 거부하는 자가 있으면 반국가적인 인물로 처벌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바쳐야 할 몫에 대해서는 대개의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얼마 나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이것은 사유재산 침해나 탈선행위보다 더 중한 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중에는 이러한 죄인이 없습니까? 우리들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받아야 할 몫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받으셔야 할 분량만큼 봉헌해야 합니다. 십일조란 것은 만년 고정액인데 이것까지도 삭감하여 탈세자가 되겠습니까? 여호와 증인파들은 헌금 무용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헌금 무용론을 가르치신 일이 없습니다. 단 지나치게 인위적이거다 외식에 흐르는 것을 금하셨을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엽전 두 푼을 드린 과부처럼 우리의 최선을 드린다면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봉헌에 대해서 칭찬을 하여 주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말 3:8에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한 말씀을 명심하여 우리의 의무를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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