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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결을 지키자 (고후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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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라고 하면 성결을 찾는 것이 생명입니다. 신자에게 성결이 없다고 한다면 그 신자는 마귀의 종 노릇을 하는 것밖에 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세상에서 짓밟히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결을 힘쓰는 것이 우리 소망있는 사람들의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일 3:3에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결을 힘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1. 신앙 사상에 성결을 지키자 우리의 신앙 사상은 특별한 성결을 지녔습니다. 우리의 성결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데 그 신앙이 성립됩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데서 우리의 자랑거리가 없고 다만 감사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 중에 기적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수준으로 여겨 신앙을 인간의 이성 표준으로 생각하며 인간 이성의 표준으로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 다른 종교들과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참 종교인 반면에 이 세상 종교들은 사람들이 만든 것들입니다. 미국 피츠벅에 있는 가장 큰 장로교회의 맥카트니 목사는 기독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기독교의 특징 하나는 예언의 성취요, 또 하나는 기적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위에서 온 종교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우주를 개발한다고 떠들지만 우주를 개발한다고 하여 인생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결코 별들의 세계의 신비를 모두 안다고 해도 인생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가서도 죄를 짓습니다. 죄 문제는 우주 개발의 과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만이 우리에게 시원함을 주고,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며, 용서함 받게 해줍니다. 기독교에서 예언의 은사와 기적을 제하여야 복음이 잘 증거된다면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없애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돌집에서 돌을 뽑아내고 집을 찾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집을 볼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합니다. 기독교의 높은 도덕적 교훈도 모두 다 초자연주의와 긴밀한 연락을 가지고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도덕 교훈까지도 전부 다 초자연성을 띤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기독교에서 초자연성을 다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를 없애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보배를 보배인줄 모르고 오히려 자기들의 유치한 사고방식으로 기독교를 성립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천년 동안 기독교를 박해하던 도전이 있었으나 기독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엄연히 존재합니다. 중세기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신학자입니다. 로마교는 아직까지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사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학은 무엇입니까? 그는 일변 헬라의 비기독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근거하고 신학을 말하였습니다. 한 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잡았고 다른 손에는 성경을 잡은 그림이 바로 아퀴나스의 사상을 전하는 그림입니다. 이런 사상이 헤겔 사상입니까? 소와 나귀가 어찌 함께 멍에를 멜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창조자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잘못된 신앙인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사상은 초자연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온 것이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창 12:4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이란 인간 수준의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정도의 것은 인간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믿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사상은 자초지종 초월성을 가진 것입니다. 이 초월성은 우리가 아무리 자랑하여도 교만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이 되며,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대화의 광장을 열라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더러 기독교의 본질인 초자연주의를 버리고 불신앙과 타협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무장 해제를 하고 전쟁에 나감은 실패를 전제하는 일입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을 구하라는 말은 좋으나 아무 장비도 없이 알몸으로 그 수렁에 들어가라는 것은 옳지 않은 말입니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대화의 광장을 열지만 빠진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는 장비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초자연주의를 가지고 불신자들에게 복음 그대로를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복음 운동은 복음 출발할 때부터 결단코 이교도와 더불어 타협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죽은 자를 깔리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무장하고 어디든지 가서 침묵도 하거니와 발언도 하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에 성결을 지키자 우리는 신앙 사상에 성결을 지킬 뿐만 아니라 신앙 생활에도 성결을 지켜야 합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중 생활을 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혹시 연약하여 행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해야 됩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회개를 한다고 하지만 종종 외식으로 하거나 또는 그 회개를 통하여 “나는 며칠 금식기도를 했다네” 식으로 명예를 얻으려는 과오를 범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회개가 무슨 회개입니까? 우리는 현실 생활에 있어서 말 뿐만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내야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동생활에서 아무런 책임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생활이요, 순결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소금 노릇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할 때에 순결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더욱 밝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까?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의 수자에 치중하여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결한 생활을 하도록 더욱 힘써야 합니다. 부패한 상황에서도 남들이야 어찌하든지 나만이라도 주님의 말씀대로 참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이니 내가 죽더라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취직을 하든지 어느 단체 속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주님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국가가 부패하는 데도 모른체하고 자기 혼자만 예수를 믿으며 천국가겠다는 것은 성도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결은 우리 기독자의 생명입니다. 먼저 신앙 사상에 순결해야 겠고, 또한 자신이 처한 사회 환경에서도 역시 순결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야 나 자신이 복을 받고 남들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결은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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