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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 복음의 원리 (갈 0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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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질 때문에 편지를 쓸 때 자기가 직접 쓰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필하도록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관례대로 친히 마지막 부탁의 말을 덧붙이기 위해서 대필자의 손에서 붓을 받아 쥐어 서명 날인을 했고 어떤 경우에는 마지막 권면과 축도까지 친필로 썼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기독교 복음의 원리입니다.

1. 기독교의 복음은 외면적이 아니고 내면적이라는 점입니다 본문 12-13절에서는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내면적이고 영적인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외적인 말에 촛점을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할례가 종교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하며 거기에 촛점을 두었습니다. 행 15:1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너희가 할례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들은 복음의 진수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가장 중요한 차원으로 끌어 올려 종교의 핵심적인 문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엄격히 말해서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할례는 조그마한 외면적 수술에 불과한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영혼의 구원을 확보해 주는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겠습니까?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오류들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세례의 중요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거기에 집착되어 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례나 세례는 계약민의 징표입니다. 하나의 육체적 행동입니다. 세례와 할례를 구원의 필수적인 수단처럼 생각하여 그 의미를 과장하여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15절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할례를 받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주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롬 2:28-29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내면 생활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심령의 변화는 뒤로 제쳐 놓고 육신적인 의식에만 치중한 나머지 세례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외면보다 내면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면서도 외면적인 것, 의식적인 것을 필요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의식적인 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형식이 없는 내용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술, 담배 문제를 살펴 본다고 해도 주초 문제로 구원을 얻고 못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처음 교회생활을 할 때 교인 생활의 형식에 따라, 주초를 끊어보고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과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교회에 나오자마자 술, 담배를 끊기는 어렵습니다. 주초에 관계없이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익어가면 술, 담배를 하라고 해도 자연히 끊어버리는, 내면으로 변화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종교를 외면적으로만 보는 것은 타락된 눈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사 29:13에서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겉모양만 있고 생명이 없는 교회, 메말라 버린 교회는 쓸모없는 교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2. 기독교의 복음은 영적인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종교의 중심 문제로 만드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할례는 다만 외적인 육신의 의식에 불과하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시행하는 인간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잘못된 생각들을 파헤쳐 완전히 분쇄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갈보리를 찾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 자기 과대망상에,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밑에서만은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십자가 없는 종교, 예수님 아닌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떠도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십자가만을 붙들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자랑할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오히려 자랑거리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모두 제각기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어떤 사람은 재산을, 또는 건강을, 권세를 소유하고 있어 모두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렘 9:23-24에서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유대인의 혈통, 로마의 시민권,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다소의 학문으로 터득한 지식을 자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로지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전파했습니다.

(1)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님께서는 세상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사양치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은 알기로 생각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은 것이요 사도 바울도 십자가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생명의 창조와 승리의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요 12:24에서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본질과 십자가 후에 부활 및 영광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계시다가 최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까지 그 고초를 견디었기에 우리에게 영생의 승리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세계를 이길 힘이 무엇입니까? 누가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예수의 십자가는 세상 역사의 촛점이요 세상 사람의 안내자이며 승리의 무기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십자가에서 핍박당하셨던 예수님을 믿는 신앙뿐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믿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생활은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로써 실천하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만을 향하여 일로 매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십자가의 반역자였으나 믿은 후에는 십자가만을 사랑하고 십자가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여러분도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만 위하여 살다 죽을 각오를 가지는 생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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