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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외 자랑할 것이 없노라 (갈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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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이나 어촌, 소도시나 대도시, 어디를 막론하고 마을마다 우뚝 솟아 있는 교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교회의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길을 가다가도 목이 긴 여인들의 목걸이에 달려 있는 금 십자가, 반지 끝에 달려서 반짝거리는 반지 십자가, 신부나 수녀들이 긴 치마폭에 늘어뜨리고 다니는 나무 십자가, 군목들이 모자나 어깨에 달고 다니는 놋 십자가 등 도처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최초의 십자가는 사형 집행 도구로써 죄인을 결박하여 거기에 매달아 죽이는 기둥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땅은 신의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죄인이 땅 위에서 죽으면 땅이 더럽혀진다고 해서 나무에 매달아 죽였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 형벌은 앗수르, 뵈니게, 애굽에서 시행한 관습이었고 특히 애굽과 칼타고에 의하여 희랍과 로마에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두 종류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T자형과 십자가형이었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다스리면서 그들의 형법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기둥 구실을 하는 나무는 항상 형장에 있었고 죄인을 데리고 갈 때는 횡목만 어깨에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형장에 가야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는 것조차 끔찍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의 무서운 사형 집행이 시작되면, 먼저 죄수의 옷을 벗기고, 나무에 붙들어 맨 후 날카롭고 무거운 납이 끼어진 가죽 채찍으로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 때에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하는 자와, 더러는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로마에서는 반역자, 도망쳤던 노예, 가장 천한 죄인에 한하여 십자가 형틀을 지웠고, 로마인에게는 그 적용을 금했습니다. 죄인을 채찍질 한 후 우뚝 세워진 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거기서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 매맞은 상처에 모기나 파리가 모여들어 피를 빨아도 쫓을 수 없고, 쫓아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참혹하고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스팔타카스라는 사람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동료에게 지우지 않기 위해서 동료를 죽이고 자기가 그 십자가를 졌던 사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 만에도 죽고, 어떤 사람은 10일 간도 매달려 고통을 당하다가 운명합니다. 예수님이 이같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전날 밤에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여 로마 군인에게 채찍을 맞고 온갖 모욕을 당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기진맥진하여 골고다 언덕을 올라 형장까지 오신 예수님을 나무 위에 뉘이고 양 손과 두 발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사정없이 내리칠 때의 그 둔탁한 망치 소리는 골고다 언덕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으로 울려퍼졌습니다. 십자가에 세울 때, 거기 못 박히신 몸이 아래로 늘어져 대못에 박힌 양 손과 발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관을 씌웠기 때문에 이마에도 붉은 피가 낭자하게 흘러 내렸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옆에 있던 강도 한 사람도 희롱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예수님을 조롱하는 말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아. 어서 내려와 봐라, 성전을 헐고 삼일만에 다시 짓겠다던 자야,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겠다”고 하며 말입니다. 이렇게 차마 눈을 뜨고 보기조차 비참한 십자가를, 그리고 형장에 나아가야만 볼 수 있었던 십자가를 지금 우리는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의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의 십자가요, 창피의 십자가였습니다. 그것을 몸에다 지니거나 달고 다닌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요, 소름끼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는 그 수치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것은 죄없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는 죄인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십자가는 극형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자기 죄 값으로 지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인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져서 죄인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강도질을 했습니까? 도둑입니까? 살인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강도, 도적, 살인을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이웃의 굶주림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소경의 죄입니다.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듣고서도 못 들은 척하는 귀머거리 죄입니다. 악법이 성행하고 불법이 자행되고 인간이 불의하게 억압당하는데도 말 한마디 못하는 벙어리 죄입니다. 예수님은 가난과 굶주림과 억압에서 고생하는 자를 보고도 못 본 체하는 장님 같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듣고도 못들은 체하는 귀머거리 같은 자의 귀를 열어주었습니다. 불법이 자행하여 억울하게 압박받는 인간을 보고서도 말 한 마디 못하는 벙어리 같은 지도자들의 입을 열어주다가 정치적인 죄목과, 종교적인 죄목으로 붙들려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멀었던 우리의 눈을 다시 열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은혜만을 자랑했고 감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속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흔적이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것은 종이나 병졸이나 포졸들의 이마에 주인의 전승자나 국가의 이름을 화인(火印)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것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라면 그는 반드시 그의 주되신 그리스도의 표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라는 뚜렷한 표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좌우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흔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므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죄인 괴수인 바울이 자신을 구원키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을 깨닫게 되자 예수의 십자가에서 정죄함을 받고 죽어가는 옛 사람인 자기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와 함께 못박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신과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박고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세상이 그에 대하여 죽었고 그도 또한 세상을 향하여 죽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기 때문에 자신의 욕심을 이루지 못함을 바울은 체험을 통해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가진 사도 바울은 이제는 자기 학벌도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주의의 엄격한 교훈도 자기에게는 생명이 없게 보입니다. 더구나 유대 혈통주의로도 새사람이 되게 할 수 없었다는 것 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정죄함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전 운명을 내어 말길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중생의 즐거움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자랑하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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