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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길 (빌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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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행로에는 좁은 길과 널은 길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빌 2:8에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기록되었고 엡 2:13-14에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갈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몇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영원한 십자가 또는 십자가의 영원성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피상적으로 볼 때에는 비천한 죽음이요 잔인하고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되신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저주받은 자만이 매달리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 가운데도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하면서 이 이상한 죽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던 그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십자가에 대한 관념을 말한다면 사형수의 교수형이라 표현함이 제일 적절할 것입니다. 당시의 십자가형을 어떤 라틴어 교수 한 사람이 그림으로 그렸는데 당나귀 한 마리가 십자가 위에 달려 죽는 모양을 그리고는 그 밑에 사람이 경매하는 모습을 그려서 로마사람들이 가졌던 십자가에 대한 태도를 표현했다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약성경은 주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이 중심이 되었다기보다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와 세상 위인들의 전기와 차이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19세기에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웅변가인 다니엘 웰스터의 전기는 863페이지이나 그의 최후의 임종광경은 불과 5페이지에 불과했고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는 5,000페이지이나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불과 20페이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기를 기록한 복음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마태복음에 1/3의 양을 차지하고 마가복음도 1/3을 기록하였으며 누가복음 역시 1/4을 차지하였고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1/2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록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복음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우리들의 구원의 기초가 되며 우리의 믿음의 근거이고 소망의 산성이 되는 것임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가신 생명과 진리의 길인 “십자가의 길”은 어떻게 출발해서 어떠한 노정을 밟으며 그 종점과 결과는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십자가의 길은 그 출발이 “자기 부정”입니다 빌 2:6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하며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라고 하는 표현에서 자기 부정의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되는 자격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 부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고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 “자기의식”이 뚜렷한 현대인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부정이 신앙 입문의 첫 관문이요 예수의 제자로서 그의 뒤를 따르려는 첫 조건이 된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요구인 것입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해 난 자와 같은 자요, 만물의 때만 못한 자요 죄인 중의 괴수라 하는 사도 바울의 심정이 바로 신앙의 관문을 통과한 심정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다”라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생이 전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으려는 자는 모름지기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길은 그 노정이 자기 비하(自己卑下)입니다 빌 2:7-8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동등 되시는 주님께서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거룩하신 분이 촌 마을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탄생하시고 나사렛 한 촌 빈곤한 목수의 가정에서 “손수” 노동을 하시며 자랐고 가난한 자, 멸시당한 자, 약자, 병자를 도우시고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는 종의 모습으로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러 왔다”는 삶을 철저히 사셨던 것입니다.

3. 십자가의 길은 그 종점이 자기희생입니다 8절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몸을 비어 낮추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자기 몸을 인류를 구원하는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상에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대만의 식인종들이 사람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악풍을 없애기 위하여 오봉(吳鳳) 선생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처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는 일이 있음으로 해서 인류의 구속 사업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주님에게 있어서 괴롭고 쓰라린 잔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라고 그의 쓰라린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그는 그 고통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결 론 십자가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검을 휘둘러 세계를 정복한 나폴레옹이 그가 운명할 때에 “나는 창검으로 유럽을 점령했으나 실패했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죽은 예수는 세계를 정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고후 6:8-10에서 기록되었듯이 십자가를 따르는 자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 한 자 같으나 유명 하고 죽는 자 같으나 살고 징 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결국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하는 것이 십자가 죽음의 결과인 것입니다. 주를 믿는 형제자매들이여, 낙심하지 말고 영생과 영광, 부활과 승리의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주께서 가진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살아 나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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