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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과 영광의 주 (빌 0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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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주님의 지상 생활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영광은 극히 중요한 2대 사건으로 4복음서들도 이 두 사건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두 사건은 일주일 내에 된 일들입니다. 만 3년간의 온 생애를 전하는 복음서의 1/3을 이 일주일간의 기사에 집중하고 있으니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대한 사건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고난 빌립보서 2장에는 주님의 성육신의 비하하신 단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2) 그 영광의 본체의 지위를 비우시고

(3) 종의 형체를 취하심

(4) 사람이 되시었고

(5) 자기를 낮추심

(6) 십자가의 죽기까지 복종하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탄생 자체가 벌써 지극한 비하요 고난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의 말구유 위의 탄생, 애굽으로의 도피, 나사렛 한 촌에서의 성장 이 모든 것은 고난의 시작이요 연속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로써 성육신 자체가 크나큰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삶 중에 있는 주님의 고난의 절정은 죽음이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사형법이란 로마를 위시한 고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형방법으로써 로마인은 행치 아니하였고 노예들이나 반역자에 한해 시행하여 그 잔인성으로 로마법의 권위를 세운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을 비하하시고 인간이 되사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난의 죽음까지 받으실 뿐 아니라 죽음 중에서도 최악인 십자가의 죽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절대주권자인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 없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성을 완성하여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남은 어머니의 해산의 고통을 통해 태어납니다. 이처럼 고난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와 인간사의 법칙이요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 9:22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고 그 결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요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갈 3:1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을 때 그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아 이 사건은 분명히 패배와 실망과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패배와 실망과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에게 승리와 소망과 복락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프랑스 루부르 박물관에 수장된 예술 작품들은 그 작가가 죽은 후에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작품은 좋으나 작가가 노후에 타락한다거나 하면 그 작품의 가치를 전락시키기 때문에 생을 마치고서 그 생의 가치를 평가하여 예술품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인 줄 압니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은 어떤 것으로도 대처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달성하신 가치는 측정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만민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남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영광 빌립보서 2장에서는 주님의 비하에 계속하여 승리의 사실을 밝힙니다.

(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심.

(2) 천상, 지상, 지하의 모든 피조물의 경배의 대상이 되심.

(3) 모든 찬양의 대상이 되심이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승리는 부활, 층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 재림 등으로 이어집니다. 동양의 격언 중에 “인생은 후반부에서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고생하나 늙어서 잘 되어야지, 젊었을 때 호화롭게 살고 늙어서 고생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60이 넘어봐야 그 사람이 복 있는 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구원사업이 먼저 고난이요 다음 영광으로 끝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기독교는 영광의 종교입니다. 현세에는 고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광의 영원함에 비하면 우리의 일생이나 현세의 역사는 긴 밤의 한 정점도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현세에서 받는 잠시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원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롬 8:18, 고후 4:17).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째,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현대의 신학계에서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경향은 참으로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육체이나 영광스럽게 변화된 육체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영원히 영광된 육체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우리들의 부활의 근거가 되며 그 분의 부활의 영체는 우리가 부활해서 받을 몸의 원형이 됩니다(고전 15:20-23, 빌 3:21). 이 사실을 안 바울은 고전 15:55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는 부활의 개가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공자에게 한 제자가 죽은 후의 상태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살아 있는 현세도 잘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석가에게 어떤 과부가 죽은 아이를 안고 와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을 때 “사람마다 모두 죽는데 너의 아들만이 왜죽어서 안 되느냐”고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되는 나사로를 일으키셨습니다. 공자와 석가의 견해와 예수의 태도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몸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또 죽은 모든 성도를 부활시킬 생명의 구주의 초연한 모습인 것입니다.

3. 고난과 영광

(1) 고난과 영광으로 예수의 구주성을 완성시켰습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는 우리 성도들이 다 같이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골 1:24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고난 자체가 부족하여 우리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으로 주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바치는 작은 봉사, 또 그 봉사 중에서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주님의 고난과 같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큰 감격이요 큰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는 주님의 영광에도 참여합니다. 얼마나 감사할만한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체와 같은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받을 것이고 영원한 세계에서 성삼위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의 깊은 뜻을 명백히 파악하고 우리가 그 고난에 동참하고 또 그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성도 여러분께서 잘 아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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